고목생화(枯木生花)

오늘 역시 교회 안은 텅 비어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이들은 열 댓명 남짓. 그 모두가 백발이 하얀 노인분들 뿐.
넓은 회당 안에서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의 목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다.

오늘날 우노스 정교회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다른 사상들로 눈을 돌린지 오래이고, 모든 일을 오직 세속적인 기준, 자신들의 이익과 흥미로만 보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과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요정과 마법에 매료되어 '과거가 아름다웠지'라고 중얼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과거 우노스 정교회가 저질렀던 죄악에 대해 성토하며 그 모습 추악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같이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교회는 이미 늙고 병든 나무이다. 꽃은 떨어지고 가지는 말라 비틀어졌으니, 어찌 이리 추할 수 있느냐?”

뭐, 괜찮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인간이 더이상 억압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유롭게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옛 일을 잊고 요정들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승리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노스 정교회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자비에르께서 요정들의 사슬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라는 계시를 주, 데오스로부터 받은 후 자비에르 그 자신을 포함하여 교회의 수많은 성인들과 투사들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요정들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는 교회 자신이 사람들을 묶는 사슬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내적 투쟁을 해 왔다.
오늘날의 모습을 그 때의 선조들이 보신다면, 씁쓸해 하실지는 몰라도 결코 노여워하지는 않으실 거라 확신한다. 그분들의 가장 큰 소원은 이미 이루어 졌으니.
아무리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한다 할지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라'는 외침은 죽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나는 싫다.

위대한 전통이 단순히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조롱받고 잊혀져 가는 것은 큰 비극이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그들이 우노스 정교회에 얼마나 큰 빚을 졌고, 오늘날에도 역시 교회에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교회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다시 한 번, 교회는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방향타이자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기에 나는 펜을 든다. 사람들이 교회와 함께 믿음과 자유를 위해 싸우던 그 날을 기억해 낼 때까지.

그 때의 열정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마른 나무에는 다시 꽃이 만개하리라.

댓글

정석한, %2007/%11/%01 %22:%Nov:

비겁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로망을 자극하는 글을 올리다니! ;_;

이렇게 정적(?) 을 무력화시키시는군요.

묘하게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리는 일기로군요. 잘 읽었습니다.

 
오승한, %2007/%11/%03 %18:%Nov:

…그리고 반박 경매를 시작했지요. 이 글이 과연 어그로를 얼마나 낮췄는지!?

 
정석한, %2007/%11/%04 %15:%Nov:

어그로 낮춰놓고 도로 치시면 공격받는것은 게임의 법칙 (…)

 
로키, %2007/%11/%03 %11:%Nov:

오.. 크림소스 수사의 인간적인 모습이 인상적이군요. 텅 빈 교회의 정경은 우리 세계의 (특히 서유럽) 세속화 경향이 떠오르기도 해서 시사적이네요.

 
오승한, %2007/%11/%03 %18:%Nov:

연구원들의 경향을 보니 이 시대의 우노스 정교회는 이미 강한 힘을 잃은 시대인 듯해요.

주위 교회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제로도 "이제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믿음의 횃불이 옮겨지고 있다" 라고 하더군요.

 
_엔, %2007/%11/%04 %18:%Nov:

으아아. 은은한게 감동적이에요, 승한님!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한 수사의 모습이 마음 속에 그려지기도 하고… 한때는 새로운 세력이었고 몰아내는 입장이었던 교회가 이제는 사라져가야 할 운명의 오래된 것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기묘하게 와닿네요.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정말 수사님 같은 분한텐 요정 팬(…)들이 조금 한심하게 보이긴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