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달 (미완)

오포스 산에서 제국군의 잔당이 민가를 습격하여 불태우고 산속에 숨은 채 진압하러 온 군대를 기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폐하께서 세렌 장군에게 진압을 명하셨으니, 진압은 성공하였으나 세렌 장군은 레스파 계곡에서 전사하였다.

이것이 세렌 장군의 죽음에 대한 실록의 짧은 공식 기록이다. 기록에 나온 제국군 잔당이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펼친 것으로 보이긴 하나, 불패의 명장이었던 세렌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하는 세피루스 경의 수기를 최근 발견하였다. 공식 수기가 아닌 개인 일기로, 최근 그의 후손이 글렌포드 도서관에 기증한 기록 중 하나이다.

그날 저녁 회의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라겐하임에서 보내온 돈울프공의 임무 관련 보고도 있었고, 오포스의 제국군 잔당 문제는 그 수로 보면 대단한 위기는 아니었지만 자칫 다른 지방에서 동조할 위험이 있어서 주의를 요구하는 문제였다. 그 사안을 얘기하다가 폐하께서 오포스에 파견된 제2 총병대 말씀을 꺼내시자 카우카라스는 폐하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제2 총병대는 세렌 장군과 함께 출발했을 뿐, 카라스 주둔군과 합류해서 방어 태세를 강화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폐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제국군 잔당은 지난번에 보낸 진압군의 총기를 탈취하지 않았소? 총병대가 없이 어떻게 대항할 생각인가. 그 결정은 누가 내린 것이오?”

“제가 내린 명령입니다. 허나… 베녹 요새에 있는 총병대를 차출하여 세렌 장군과 합류하기로 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카우카라스의 대답에 세피즈는 바로 반박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소! 베녹 요새는 총기를 한 자루도 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 보고는 어디서 들은 것이오?”

말이 오가는 사이에 순식간에 회의실은 소란스러워졌다. 그 발언들에 귀기울이며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세렌 장군의 파견에 대한 정보는 모두 모순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만.”

낮은 한 마디에 회의실의 혼란은 마치 중간에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모두의 시선은 폐하에게 향했다. 폐하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고, 눈빛은 차가웠다.

“한 명씩, 천천히 말씀하시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소.”

하나씩 정리하면서 드러난 진상은 더욱 엄청났다. 누군가 아주 교묘하게 보고체계와 연락망의 틈새를 이용해서 왕국의 최고 정치적, 군사적 결정권자들에게 서로 충돌하는 정보를 준 것이다. 아니면 한 명 이상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세렌 장군이 이끄는 오포스 파견군의 실상은…

“채 백 명이 되지 않는 보병에, 총병대나 궁병대도 없이 레파스 계곡으로 들어간단 말인가.”

혼잣말처럼 말씀하시는 폐하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히 들려왔다.

“수가 정확히 파악된 적도 없고 숨는 데 능하며, 지난 번에는 오백 명 이상 사상자를 낸 반란군을 상대로.”

아무도 말을 하거나 고개를 들지 못하는 동안 폐하는 낮게 말씀하셨다. 왕의 분노는 얼음칼보다 차가웠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사지에 내몰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된 것인가. 누가 진정 결백하고, 누가 이 일에 동참했는가. 나는 시선을 살짝 들어 다른 얼굴들을 살폈지만, 하나같이 불안으로 굳은 표정들은 읽기 어려웠다.

이 일기는 시기상 복스 포풀리교토사양구팽 (狡兎死良狗烹) 이후 기록된 것이다. 따라서 세렌 장군이 그렇게 불충분한 병력으로 제국군 잔당이 기다리는 함정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고, 당시의 정황이나 세피루스 경의 인식도 이것이 모살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길 수 없는 전장으로 내보내는 방법은 또한 건국의 주요 공신 중 하나인 세렌 장군을 정식으로 재판하여 사형하는 것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안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구였는지 시사하는 자료를 필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세렌 장군의 죽음으로 인한 재판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관여한 일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한두 사람의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이 기록을 남긴 세피로스 경도 혹 자신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 기록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사건의 주동자는 많은 공범을 만들기보다는 정보 혼란을 일으키는 방법을 택했으며, 상당히 주도면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때 회의실 입구 쪽에서 가벼운 소란이 들려왔고,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일어서서 나가보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회의가 진행 중이라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문 앞에 선 경비는 말하면서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문 앞에 와서 서있는 사람들은 바로 과자와 빵, 음료를 든 시녀들과 왕비 폐하셨다. 그제서야 나는 시간이 얼마나 늦었는지 깨달았다. 이렌가르드 여왕께서는 회의가 늦어지는 날이면 시녀들과 함께 야식을 가져다주시곤 하셔서, 이렌가르드 여왕이 아닌 세렌 장군이 폐하의 배필이 되었더라면 대신들의 배가 덜 나왔을 거라고 우리끼리 농담을 하기도 했다. 회임하신 이후 직접 수고하시지 말라고 만류해도 여왕 폐하께서는 웃으시며 남편을 한 번쯤 보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시곤 했다.

나를 보고 살짝 목례하면서 여왕 폐하께서는 나와 경비의 표정을 살피고 순식간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셨는지, 시녀들을 손짓으로 물리셨다.

“그렇다면 잠시 폐하만 뵙도록 하지요.”

여왕 폐하의 정중한 미소에 경비는 재빨리 길을 비켰지만, 대신 내가 만류했다. 세렌 장군의 문제로 회의실 분위기가 심각한 상황이 여왕 폐하께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염려스러웠다.

“폐하… 밤이 늦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셔야…”

“경께서 저를 막으신다면 제가 쉬는 시간도 그만큼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부드러운 말투에는 철과 같은 심이 있었다. 만삭이 되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이 젊은 여성이 어떻게 한 나라를 호령하고 난공불락의 라겐하임을 함락시켰는지 나는 천천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제게 조정 회의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그렇다면 들어가실까요. 경께서도 자리를 오래 비우셨습니다.”

결국 나는 여왕 폐하를 따라 얌전히 회의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 폐하께서 방에 들어서시자 폐하의 시선은 순식간에 여왕께 향하였다. 여왕 폐하 뒤에 서 있었던 나는 우리 폐하의 표정을 순간 그대로 볼 수 있었는데, 본 것 자체가 죄스러워 그만 고개를 돌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혼자 버려진 어린아이 같은 눈빛, 남자가, 하물며 한 나라를 책임진 국왕이라는 위치에 있는 남자가 온 세상에 아내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그런 표정을.

폐하는 아무말 없이 이렌가르드 폐하께 손을 뻗으셨고, 여왕 폐하는 역시 말 한 마디 없이 조용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분 곁에 서셨다. 여왕께서 우리를 잠시 조용히 바라보시자 우리는 마치 약속한 것처럼 일어서서 자리를 비워드렸다.

우리가 복도에 서성이며 근심에 찬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회의실 안에서 두 분이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긴 시간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이윽고 문이 살짝 열리더니 경비가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고하였다.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순간 멈칫했다. 방안에서는 국왕 폐하께서 벽에 기대두셨던 검을 여왕 폐하의 도움을 받아 허리에 차고 계셨다.

“폐하…?”

세피즈의 부름에 폐하께서는 고개를 들고 우리 모두를 마주보셨다.

“오셨소이까, 공들. 카우카라스 공께서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기병을 모두 모아주시겠습니까.”

“하오나, 폐하…”

카우카라스가 말을 잇기 전에 폐하는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보셨고, 이에 카우카라스는 즉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회의실을 떴다.

“폐하, 직접 출군하려 하십니까.”

세피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폐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끄덕이셨다. 검대를 조여주시던 여왕폐하와 잠시 시선이 마주치시더니 그분은 한결 활기찬 자신감에 넘쳐서 말씀하셨다.

“세렌 장군은 나의 친우요. 지금 위기에 빠진 장군을 친구인 내가 구하러 가지 않는다면 나의 명예란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씀에 방안의 분위기는 숙연해졌으나, 나는 감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렌가르드 폐하께서 해산하시지 않은 지금 폐하께서 옥체라도 상하시면..

“허나 폐하, 폐하께서 친히..”

“내가 지금 누구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폐하가 조용히 말을 가로막으시자 중신들은 서로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는 이렌가르드 여왕폐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포옹하셨고, 우리들은 예의바르게 시선을 돌렸지만 두 분이 빠른 재회를 기약하는 낮은 말씀소리는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아쉽게 여왕폐하를 놓으신 폐하는 돌아서서 회의실에서 나가셨고, 우리들은 불안히 서로 눈치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여왕폐하는 배에 한 손을 얹으신 채 그런 그분의 뒷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