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가스트의 해안에 서서

에레모스 반도의 남서쪽 끝에 있는 해안은 외지고 황량한 곳이다. 바위투성이 해안에 서서 바다를 내다보면 모래를 때리는 파도소리와 멀리서 쓸쓸한 갈매기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적막 속에 서게 된다. 맑은 날이면 남쪽으로 로크 섬의 희미한 윤곽이 보이기도 하는 이 해안은 약 삼백년 전까지만 해도 이민족이 세운 왕국의 앞바다였다.

남쪽으로 로크 섬을 지나 암브로지아 해를 건너면 산지가 험준하고 척박한 땅 스벨트란드가 나온다. 대지에서 나는 것이 얼마 없이 바다만이 손짓해 부르는 이곳에서 항해해 나온 해적과 약탈자들에 대한 언급은 옛 제국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뛰어난 선원이자 항해 기술자, 사나운 해적, 용맹한 전사이며 잔인한 노략자인 이들은 제국군도 애를 먹은 상대였으며, 쇠락기의 제국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기도 했다.1)

이 민족 집단을 혹자는 스벨트란더나 이오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흔히 부르는 이름은 ‘반트’였다. 이 명칭은 그들의 주신인 바다의 여신 반듀아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이 언어학자 오핀 스트라스의 추정이다.

지금부터 약 450년 전, 제국이 몰락하고 각종 군벌과 토후가 난립하는 혼란중에 반트족은 이 외진 해안에 집단적으로 상륙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다른 반트족 집단 및 주변 에레미안 왕국과 거듭되는 충돌 속에서 통합된 지도력의 필요성을 느낀 이들은 차차 정치 체계를 정립하며 왕국의 모습을 갖추어갔고, 지역 명칭은 반트어의 영향으로 벨가스트 혹은 벨게스트가 되었다.

오늘날 벨게스트 혹은 벨레고스트라고 하는 이 남서쪽 지방은 대대로 반역의 땅이라고 매도당하고, 반트족의 후예인 이 지역 출신은 종종 편견과 백안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나는 목격해왔다. 또 최근의 역사적 담론을 보면 옛 벨가스트가, 그리고 벨가스트인이 흘린 피가 통일 에레모스 왕국의 초석이었다는 사실은 잊혀졌거나 아니면 고의로 외면당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일의 기록만이 아니다. 앞서 지나간 행동과 결정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주며, 따라서 역사란 과거로 끝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향해 우리의 얼굴을 비추어주는 거울인 것이다. 따라서 건국에서 벨가스트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나라이며 어떤 나라여야 하는지 바로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삼백 년 전,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전에 있었던 통일과 건국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그 해답을 옛 벨가스트의 바람 거센 해안에서 찾고 싶다. 그리고 '요정족의 세렌'이라고 불렸던 여성에게서 찾고 싶고, 오늘날까지 '황금손 남자'의 전설을 남긴 거상 진 뤠이신에게서 찾고 싶다. 다른 신을 섬겼거나, 다른 언어를 말했거나, 다른 곳에서 왔거나, 다른 세계의 이질감과 공포를 엿보인 이들 건국의 공로자에게서.

건국이 한 종교나 한 민족만의 성과가 아니었듯 이 나라도 동질적인 특정 집단만의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미래 역시 종교나 혈통이나 사상이 무엇이든 함께 나아가야 할 미래, 낯설음과 새로운 가능성에 열린 마음으로 발견해가야 할 미래라고 나는 믿는다. 이 땅에, 그리고 이웃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외면하지 않고 분열이 아닌 힘의 원천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어떤 놀라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 삼백 년 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건국의 영웅들이 그랬듯이.

1) 예, 별걸 다 뒤섞고 있지만 판타지 좋은 게 뭡니..—로키

댓글

오승한, %2007/%10/%16 %11:%Oct:

이건 모두 이렌가르드를 밀기 위한 좋은 구실이군요(…)

 
로키, %2007/%10/%16 %13:%Oct:

쉿..(..) 이라기보단 세렌이나 진대인, 아스파도 밀어줄 수 있는 설정인 겁니다 (?)

 
_엔, %2007/%10/%16 %21:%Oct:

펜너 옹 벨가스트 해안까지 노구를 이끌고 답사가신 건가요?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하실 것 같네요.

 
로키, %2007/%10/%16 %23:%Oct:

사실 저도 그점 때문에 할루크 말덴씨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형식을 취할까도 했지만, 구성상 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답사차 (그리고 말씀대로 마음도 복잡해서) 노구를 이끌고 그 지방까지 간 게 맞을 것 같아요. 릴리도 할아버지한테 졸라서 같이 갔으면 어떨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