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교수의 팬레터

(친애하는 벗에게 보기)



마르셀 프루스트씨에게,

안녕하시오이까. 글렌포드 대학에 있는 마티아스 펜너라고 합니다. 프루스트씨의 글은 학술지를 통해 잘 보고 있습니다. 면식도 없는 분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다니 결례가 아닐까도 생각합니다만, 그간 소설로만 글을 만나던 차에 이렇게 역사 복원 작업에도 뛰어든 것을 보니 반가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펜을 드오.

다 늙은 교수가 무슨 소설이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까 모르겠지만, '아르베스에 뜬 푸른 달'이나 '바람의 시(詩)' 같은 프루스트씨의 작품은 그 자체로 독창적인 역사관과 역사 연구의 소산이며 감성도 더없이 풍부하니 가벼운 대중 소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소. 틈틈이 읽으면서 그 아름다운 문체에 감탄하는 시간은 이 늙은이의 작은 즐거움 중 하나라오. 우리 손녀 아이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별로 생각이 없는 모양이오. 같이 읽고 토론해보고 싶었는데, 하긴 자기 일에도 바쁜 젊은이 시간을 자꾸 뺏으려는 게 노인들의 못된 습관이지요.

어쨌든 프루스트씨의 문학적 감수성과 따스한 시선은 역사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더욱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 소설가로서뿐 아니라 학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렇게도 뛰어난 신진이 많으니 우리 나이든 사람들은 격세지감을 느끼면서도 한편 우리가 언제 떠나도 이 일을 계속할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다만 학자로서의 욕심에 잔소리를 좀 한다면, 역사적 자료와 결론을 연결하는 과정에 조금 더 충실하면 연구의 결실이 더욱 풍부해지지 않을까 생각하오. 특히 최근 글 '죽은 왕자를 만나다'는 결론보다는 추측이 더 많은 글이지 않습니까. 물론 이미 지나간 일을 연구하는 이상 추측은 논증 과정에 필수적이며, 또 정사가 아닌 야사에도 연구가치가 충분한 것은 물론입니다.

다만 정사가 아닌 민담과 설화를 사용하더라도 (오랜 친구이며 훌륭한 학자인 할루크 말덴 역시 그러한 자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요) 그러한 자료 중 서로 보강하거나 충돌하는 것을 찾아 역사적 실상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모자란 부분은 추론으로 보완하여 결론을 내는 것이, 마치 신 포도에서 최상의 술을 한 방울 한 방을 우려내듯 불완전하고 때로 왜곡된 자료에서 진실을 증류해내는 것이 우리 학자의 본분이라고 믿소. 이미 잘 하고 있지만 더욱 발전을 촉구하는 것이 이 노교수의 욕심이지요.

건국기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은 것을 보니 혹시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한 사람의 독자로서 해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니,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 언제든지 미약한 힘이라도 보태겠소이다. 그러라고 친구에게 협박을 받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활동은 돕는 것은 주책스러운 팬으로서 즐거운 일이 아니겠소.

늘 건강하기를 바라며, 학문적 동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 앞으로도 작품과 글을 기대하겠소.

마티아스 펜너 씀.



릴리안이 달여준 결명자차를 마시며 펜너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이로써 결명자와 가시오갈피 값은 한 셈인가. 쓴 편지를 눈으로 훑으며 그는 다시 할루크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의 아름다운 문체를 보고 있노라면, 도무지 남자의 것으로는 믿을 수가 없네.'

릴리를 생각하며 노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릴리도 그렇게도 재주가 출중하고 총명한 아이인데, 여자의 몸인데다 몸이 불편하여 그 재주를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 그의 개인적 책임인양 아프게 와닿았다. 피디아스의 일 이후로 더욱… 아무 질문도, 책망도 하지 않고 그저 언제나처럼 모든 것을 안으로 삭이는 릴리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 마음이 어떨지 알 수가 없어서 더욱 마음이 찢어졌다. 그 침묵 속에서 손녀아이는 더욱 멀어지기만 하는 느낌이었고, 그 거리감은 그에게 뼈저린 회한이었다.

'나는 장차 거목이 될 어린 나무가 가시덤불에 집어삼키우나 싶어 너무나 안타깝네.'

'혼담이 오갈 시기가 되었으니, 좋은 짝을 만나야 할텐데 말일세.'

펜너 교수는 눈을 피곤하게 문질렀다. 오랜 친구에게마저 말할 수 없었다. 피디아스의 비밀을 멋대로 누설할 수 없어서 그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할루크가 그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늘 웃음과 노래로 반짝이는 그 어진 눈빛이 실망감과 경멸로 차가워진다면 견딜 수가 없기에…

'미안하구나…'

바위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이 부담은 그가 언제까지나 지고 가야 할 무게, 그리고 정당한 그의 몫. 그렇다 해도 조금이라도 일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가 누구보다 아끼는 두 젊은이에게 무엇이든 해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그는 대학 동료가 대학 지원금 문제로 재무부 관료와 만난 이야기를 떠올렸다. 젊은 여자가 얼마나 깐깐한지 말도 못한다고 하는 푸념은 남자가 그랬더라면 유능하고 분명하다고 칭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흘려들었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관료 중에도 여성이 있지 않은가. 그 재무부 관리 이름이 아이데나이.. 그웨나라르크라고 했던가.

'그웨나라르크라…'

어쩌면 그 여성과는 릴리의 장래 문제 외에도 상담할 것이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 그웨나라르크 가문 사람이라면 가문에 아스탈키안 그웨나라르크와 관련한 자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만나봐야겠다고 다짐하며 펜너 교수는 잉크가 마른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댓글

_엔, %2007/%11/%04 %18:%Nov:

할아버지;ㅁ;!!!!! 대중 소설을 읽으면서 즐거워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오고(…)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조언이 무네큥이네요. 할루크 씨에 대한 묘사도 좋고… 아이데나이 양까지 끌고 들어오시다니 정말 역사학계의 마당발 다우시군요! 조만간 조만간 답장 쓰겠습니다.

 
정석한, %2007/%11/%04 %20:%Nov:

아이덴을 끌고 들어가 주셔서, 일기 쓸 거리가 생겼답니다. 뭔가 반짝 하고 스치는게 있어서요. ^^;

 
오승한, %2007/%11/%05 %11:%Nov:

펜너 교수의 문어발은 여기에서도 드러나는군요. 그러니까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을 가지고 손녀에게 떽떽거리는 장면도 포함시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