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덴의 편지

(노교수의 팬레터 보기)



펜너 교수님께.

보내주신 서신은 잘 읽었습니다.

평소 교수님의 풍부한 학식과, 역사에 대한 균형 있는 시각을 늘 존경해온 터에, 이렇게 서신까지 보내 주시니 솔직한 심정으로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학계에 여러 해 동안 큰 공헌을 행해오신데다, 최근에는 ”듀아라르크” 와 같이 학문적 가치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그 가치가 충만한 글들을 기고하시니, 저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즐겁게 교수님의 글을 읽고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논문이나 학술 기사가 많은데, 그러한 기사들은 같은 역사학자 이외에는 선뜻 관심을 갖고 읽기가 어려운 것들이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학계의 큰 어른이신 교수님께서 앞장서서,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고 고증하면서도 또한 하나의 글로서 흥미를 부를 수 있는 글을 기고하고 계시니만큼 앞으로는 학식이 깊지 않은 사람도 우리 왕국의 역사를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니 부족한 소견이나마 크게 잘 된 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교수님의 좋은 글에 늘 감사드리고 있는 한 여성이 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문의하신 말씀 중에서, 저희 가문의 시조이신 아스탈키안 그웨나라르크 공과 관련된 자료에 대한 부분부터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저희 가문에는 아스탈키안 공에 대한 자료가 다른 곳과 다르게 풍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시기적으로는 이라하에서의 싸움과, 마나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외무 대신으로 등용되신 사이의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고의로 자료를 남기지 않은 것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

최근 ”죽은 왕자를 만나다” 와 같은 기사에서 “의형제가 죽어가는 동안, 이니스의 백조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 제 부족한 소견으로는 필시 친구인 아스파 왕자의 죽음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느낄 만한 행위를 제 선조이신 아스탈키안 공께서 하셨음을 확신합니다. 가문의 시조이신 아스탈키안 공에 대한 자료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유독 그 시기의 자료만 없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학회에 기고할 만한 내용은 못 되는 추측이지만, 다른 곳에서 이와 관련된 자료를 발견한다면 그 자료의 신빙성을 입증할 만한 정황 증거는 될 것입니다. 만일 교수님께서 “이니스의 백조” 의 친우에 대한 배신 행위를 알려주는 논문을 쓰시게 될 경우를 위해, 제 친필 서명을 동봉하였습니다. 이로서 그웨나라르크 가에는 특정한 시기의 아스탈키안 공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증언을 그웨나라르크 가의 사람이 직접 했다는 점을 밝히시면 불필요한 마찰이 적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편 다른 자료들은 제가 시기별로 정리하여 그 사본을 마련해 두었으니, 교수님께서 바쁘시지 않은 시기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직접 찾아뵙고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빌미로나마 오랫동안 존경해온 교수님을 뵐 수 있다면 저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또한 손녀분이 제 또래라 하시니 저로서도 한 차례 정도 만나뵙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빠른 시일 안에 함께 자리하고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기를 저로서도 바라는 중입니다.

다만, 할아버지 되신 도리로 손녀딸이 좋은 혼처를 찾고, 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한 심정이겠지만 여성의 행복을 좋은 혼처를 찾는 것으로만 제한하시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최근에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고, 남편이나 자식의 성공을 이끌어 내는 것 못지않게, 그 자신의 이상과 목표를 실현해 내는 것 역시 훌륭하고 가치있는 일이랍니다.

릴리 펜너 양은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재원이라 들었습니다. 아마 작년 베일 수도원의 차석 졸업생이었던가요? 귀족 집안의 영애들 가운데에도 교양이나 학식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많은 요즈음이니만큼 실로 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될 분입니다. 그런 분이라면 틀림없이 사회에 가치있는 공헌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일전에 교수님께서 몸을 담고 계시는 글렌포드 대학의 동료 교수이신 라르손 교수께서 대학 지원금 문제로 재무부에 다녀가셨는데, 재무부에서는 구체적인 학생 수와 논문 발표 수, 여러 권위있는 학회지에 기고된 기사의 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각 대학에 할당하는 지원금을 결정하고, 또 그 안에서도 각 교수님께 지원이 가능한 연구비의 액수를 설정하는 것이 규정입니다. 결코 라르손 교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학문적 성과를 단순한 수치로 재려 들거나, 지원금을 명분 삼아 대학을 쥐고 흔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해에 지원이 가능한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예산이 조금 더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곳에 지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그 원천은 국민의 세금이니만큼 국민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좋은 논문과 기사를 가지고 예산을 집행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당연한 판단임을 이해해 주시고, 라르손 교수께도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건강에 늘 신경쓰시고, 감기 조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추신. 조만간 연락을 드리고 찾아뵙고자 합니다. 무례하다 물리치지 마시길 소망합니다.

아이데나이 에스카를라테 그웨나라르크 올림



역사학의 거장,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노교수에게 쓰는 편지는 온 몸의 기력을 다 소모하게 만들었다. 재무부 채용 면접 날에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그나저나, 릴리 펜너라.'

그러고보니 브라운슈바이크 자작의 둘째딸이 볼멘소리를 낸 기억이 난다.

“그 아이는 펜너 교수의 손녀잖아요. 불공평해요.”

장학금 심사에서 릴리 펜너와 함께 최종 후보에 올랐다가 떨어졌던 아가씨다. 그날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입맛이 쓰다. 수치도 모르는 아가씨 같으니.

우수한 학생을 장려하고, 또 가정 형편 때문에 부득이하게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을 줄이기 위해 있는 것이 장학 제도이다. 릴리 펜너 역시 노교수의 손녀인 만큼 당장 한 학기의 등록금을 걱정해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브라운슈바이크 자작이면 귀족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부호다.

원래대로라면 선정 대상에도 못 들 일인데, 집안의 권세를 빌미로 억지로 후보에 이름을 올려왔길래 그대로 처리해줬을 뿐이다. 그녀는 릴리 펜너보다 성적이 나빴으니까.

그랬더니 바로 '거장 펜너 교수의 손녀이니 다른 학생보다 성적이 좋은건 당연한게 아닌가. 일률적으로 비교하는것은 불공평하다.' 고 항의를 해 오니, 도대체 사람은 겉보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법이다. 얼굴 가죽이 두껍게 생기지는 않았는데.

그 날의 일 때문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릴리 펜너의 이름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올라온 서류로만 보면 무척이나 우수한 아가씨였는데, 실제로는 어떨까. 지적 수준이 비슷한 상대와의 대화는 늘 즐거운 법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머님께선 교만하다고 난리를 치시겠지만, 내 또래의 젊은이들 중에서는 지금까지 그다지 대화가 통할 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그 상대가 여성이라면 더더욱 귀한 존재다. 하루 정도 일을 쉬고라도 만나볼만한 상대다.

“이런, 이런 무엄한!”

밖에서 아버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조용히 키득거렸다. 뒤이어 무언가를 내던지는 소리가 났다. 학회지를 읽으셨던 모양이다.

이번의 기사는 ”죽은 왕자를 만나다“일까? 아니면 ”흑의 재상“일까?

다행히 아버님은 심신이 모두 건강하시니, 저 정도의 흥분은 건강에 오히려 도움이 되겠지. 잘 된 일이다.

그나저나 아버님도 참. 사실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실 것은 없는데. 게다가 “최근의 그웨나라르크는 선조 아스탈키안 공의 업적을 뛰어넘고 있다.” 는 식으로 썼어도 선조를 모욕했다고 펄펄 뛰실 것이 뻔한 일이다. 요는 그웨나라르크를 운운하기만 하면 어떤 내용이던 간에 펄쩍 뛰시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되도록 자주 그웨나라르크를 다루어야 겠다.

아버님의 건강을 위해서.

댓글

정석한, %2007/%11/%04 %21:%Nov:

사실 아이덴과 릴리 양이 또래라고 보기는 무리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자기 나이는 깎는게 20대 후반의 본성 아니겠습니까. (먼 산)

 
로키, %2007/%11/%05 %09:%Nov:

뜨끔..(..)

 
_엔, %2007/%11/%04 %21:%Nov:

와와. 너무 공정하고 똘망똘망;하고 독립적인 아이덴 씨 성격. 문단마다 성격이 드러나서 너무 귀여워요. 여자 성격 잘 못쓴다고 하셨지만 전혀 남자 같지도 않고 매력매력 +_+ 특히 아버지 관련된 부분에서 유머가 대단하십니다b

릴리 또 칭찬받아서 너무 좋대요~ 어서어서 일기를 써야겠어요 저도.

 
로키, %2007/%11/%05 %10:%Nov:

푸하..; 아이덴양 성격 대단한데요. 제 친한 친구하고도 성격이 좀 비슷해서 더 정이 가요..^^ 똑 부러지면서 경우 바르고, 장난기도 있는.. '펜너 교수 손녀니까 일률적으로 비교하지 말라'는 발상은 우스우면서도 한편 실력 없는 걸 변명하려는 사람들 수법이란 게 다 비슷해서 입맛이 쓰네요. 우리 모두 아이덴 양 아버님의 건강을 위해 달려봅시다! (..)

 
오승한, %2007/%11/%05 %11:%Nov:

아이덴, 유산상속을 위해 아버지를 글로 죽이려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