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물을 먹은듯 희미한 빛으로 하늘을 밝히는 밤이면 300년 전의 왕자2)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요정들이 입는 긴 소매 옷을 입고서 옛 신성한 숲의 발치를3) 배회한다고 합니다. 나무들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숲을 지나가는 사람은 그에게 붙들리게 되고 그는 자신은 역모를 꾸민 적이 없고 왕위에도 관심이 없다면서 부왕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해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려 한답니다. 그때 혹시라도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면 절대로 안되는데 그의 눈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그것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게 된다고 해요. 그러나 풀려나는 방법 또한 아주 간단한데 무엇이든 슬픈 추억을 들려주면서 삶의 아픔을 호소하면 왕자는 마음이 흔들려서 도리어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고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순전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엔듀리온이라고도 불리는 칼라인 듀리온의 서자 아스파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장군이었다고는 해도 전쟁터에서 큰 공적을 세운 일 한 번 없고 정치적으로 입장을 분명히 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들을 때면 원인 모를 아련한 슬픔을 연관지어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명성의 공은 정사의 서기관들이 아닌, 꽃처럼 수많은 보통의 민중들 앞으로 돌아가야 마땅할 것입니다. 아스파는 오래 전부터 민중들에게 -건국 영웅들 중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고 있는 사랑을 반영하듯 아스파에 대해서는 어떤 건국 영웅에 대해서보다 더 많은 설화가 전해져내려오고 있습니다. 상세한 정황이 밝혀져 있지 않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특히 많은 이야기가 있어, 위에서 기술한 유령 전설처럼 슬픈 것에서부터 말 그대로 황당무계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날 죽은 것은 그가 아닌 그의 이복동생이요 이렌가르드의 아들인 마나였고 훗날 마나로 알려진 왕은 실은 아스파였다던지, 아니다, 죽지 않고 도망친 아스파는 헤아드와 텔가렌 마지막 마법사라고 불리는 요정의 지팡이 페레그린이 되었다, 혹자는 왕자가 신비한 방법으로 죽음을 피하고 타이샨까지 가서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며 언젠가 세상이 멸망할 날이 되면 다시 돌아와 의로운 자와 거짓을 말한 자를 가려낼 것이라는 전설까지 있습니다.
위풍당당한 여러 건국 영웅들 가운데 유독 아스파만이 민중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두 가지 설명에 대해서는 그 그럴듯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스파가 독립 전쟁을 전후하여 잠시 임시 총독으로 부임했던 텔가렌 영지에서 선정을 베풀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아스파에 관련된 설화들이 텔가렌 지방을 중심으로 퍼져있다는 사실이 이 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장교들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철권 통치를 자행하는 일이 많았던 당시의 정황으로부터도 같은 것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일화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아스파는 젊고 이상주의적이며 유약하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른 군인 출신 총독들과는 달리 온정주의적인 통치를 펼쳤다면 특별한 명재판관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스런 모습으로 각인되기에 충분할 수도 있었겠지요. 때에 따라서는 전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스파의 특이한 인기에 대한 두번째 설명은 민중들의 심리란 비극적인 영웅을 동정하곤 한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민중들은 그가 악한 계모 이렌가르드에 의해 반역의 누명을 쓰고 비겁하게 암살당했다고 믿어왔습니다.4) 그리고 그가 반역의 누명을 쓰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착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야말로 민중다운 감수성으로 선량하고 비극적인 영웅을 동정하는 설화를 지어 서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단순한 대중적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요? 베일에 가려진 아스파의 죽음의 진실에로 우리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요? 저는 적어도 이 유령 전설과 그에 얽혀 있는 믿음들에는 상당한 정도의 진짜 역사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스파는 실제로 교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몰래 요정들을 피신시켜주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며5) 교회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해 화형당한 이단자 아샤 티리 또한 그와 가까운 사이였고 심지어 반란에 그를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던 일이 있음이 알려져 있습니다.6) 물론 아스파는 하나하나의 요정을 피신시켜 주었을 망정 전체로써의 요정 편에 서서 일했던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결국엔 반란에 참여하는 것 또한 거절했던 것으로 추정되니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마음이 흔들리고 요정에게 동정적이었다고 하더라도7) 최종적인 순간에는 항상 자신의 아버지와 그의 국가로 돌아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설령 그의 최종적인 충성심이 교회와 인간과 함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적들은 자체만으로 반역죄에 붙이기에 충분한 것들입니다. 만약 아직 갓난아기였던 칼라인 듀리온의 적자 마나를 위해 아스파를 제거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있었다면 -그것이 이렌가르드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쁜 계모에게 희생당한 선한 아들이라는 구도는 대중들의 설화를 그대로 믿기에는 너무 흔하고 전형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들만으로도 칼라인 듀리온을 설득하기에 충분했을지도 모릅니다. 칼을 휘두르면서 뼈가 굵은 칼라인 듀리온은 그것이 설령 인간의 이상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칼을 뽑기를 주저하는 낯선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이 가설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 줍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거나 믿는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일어나는 기적 같은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의 친아버지이자 나라의 왕인 자의 허가만 있다면 통일 왕국 건설의 혼란 속에서 개인적인 세력도 구축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곁을 지켜줄 친구 하나 갖고 있지 않던8) 서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스파의 죽음은 그가 왕권을 노리지 않을까 의심한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죄목은 반역이었고 그것은 누명이었다는 텔가렌 지방 민담의 내용은 의외로 비밀스런 진실에 아주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역사 읽기를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는 자료들로부터 대담한 논리의 비약'을 펼치는 방식이라고 부르며 인정하지 않는 입장도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는 이런 방식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는 그 본성상 정사로는 결코 보존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는데 민담이나 설화와 같은 '정확성을 보증할 수 없는 자료'는 그런 부분의 기억이 보존되어 왔을 법한 유일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불살 장군 아스파를 예로 들어 보지요. 정사의 기록들만 보자면 그를 양진영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인이면서도 싸움을 겁냈던 비겁한 인물로 읽어내는 일도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의 기억처럼 민중들 사이에서 보존되어 내려온 아스파 해석 방식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는 그러한 영향이 어떠한 객관적인 역사의 지평에 대한 오염이라고 여기는 관점을 거부합니다. 진정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하기는 할까요? 야사들의 기록은 오히려 우리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하나의 암시이고 예민한 풍향계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원래 저의 글은 이쯤에서 마무리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출간된 안토니오 카투스 교수님의 요정, 그 숨겨진 진실을 읽은 뒤 부족하나마 요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어, 교수님의 견해에 대한 반론을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설화를 연구해 본 일이 있으셨더라면 마법이 요정의 것이 아니라는, 그런 판단은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저는 감히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요정들이 반도를 떠난 뒤 제가 앞서 인용한 아스파 유령 전설과 유사한, 마법적인 요소가 포함된 설화들은 모든 지역에 걸쳐 급속도로 사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반도 전체에 걸친 마법의 쇠퇴와도 발걸음을 같이 한 현상이었습니다. 만약 마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무선적으로 발현되는 형질이라면 그 발현을 탄압할 요정들이 없어진 후 마법은 오히려 번성했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마법은 물론이고 마법에 대한 암시가 들어있는 설화들마저 요정의 뒤를 따르듯 서둘러 우리들의 왕국을 뜬 것은 적어도 요정들이 마법에 대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집단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저는 또한 요정이 별개의 종족이 아니라 단지 특별한 인간들이었다는 교수님의 견해에도 반대합니다. 요정들은 인간들과 닮은 존재였지만 종족으로써 구분되는 면모 또한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들은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고 하며9) 눈동자가 없는 붉고 푸른 구슬과 같았다고도 전해집니다.10) 그들의 분노한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미쳐버린 사람들11)에 대한 전설은 여러 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것 또한 그들의 눈이 가진 힘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스파 유령 전설에서도 아스파의 눈이 특별했고12) 그것을 바라보면 사람이 미쳐버린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 대목은 아스파의 착한 마음에 대한 호의를 담은 전설 전체의 맥락과 맞지 않습니다. 한 개체인 아스파의 개성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족 전체의 특성을 대변하고자 한 구절이라고 읽는 것이 옳겠지요.
안토니오 카투스 교수님이 고명한 학자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인간과는 다른 육체적, 심리적, 마법적 소질을 지니고 있던 요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그들에게도, 그들을 물리치고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교회와 그 기사들에게도 올바른 경의를 표시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 또한, 저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댓글
또다시 전장의 북소리! 반박 경매의 시작이군요!
(… 이로서 크림소스 수사님의 칼에 찔리는 비극은 이틀 뒤로 미뤄졌군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선조님(…) 이 부를 위해 친구를 판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군요! 아아, 조금 빠르게 읽었으면 금번 일기 거리로 참고했을 텐데 말입니다.
둥둥둥. 저는 먼저 전장으로 갑니다. 뱀프님도 무운을!
전문 학자하고는 또 다른 눈으로 역사를 보는 마르셀 프루스트 특유의 관점이 재미있네요. 몽환적인 느낌의 유령 이야기와 서로 충돌하는 풍문들은 진실의 유동성을 잘 보여주고, 그걸 실제 역사적 사실과 엮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에 대한 정통파 역사학자 펜너 교수의 비판도 잘 보았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