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작별인사

칼라누스의 측근 세렌이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편지를 구했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바다로 출항할 준비를 하고 있던 한 요정으로 추정됩니다.1) 편지가 성공적으로 세렌에게 전해졌는지, 도중에 자비에르 세력의 손에 들어갔는지, 아니, 애초에 보내지기는 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합니다.

편지는 엘레할 신앙과 파티아에 의한 예언 시스템 등 지금은 잊혀진 요정들의 풍습에 대해 약간이나마 빛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어 보입니다. 편지는 또한 세렌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을 이야기해줍니다. 이 자료 하나를 가지고 세렌이 요정들 및 제국의 구세력과 한 편이었다고 단정짓는 것은 무모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세렌이 엘레할의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는 언급에는 주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구절은 그녀가 마법 혹은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러나 제가 이 편지를 주목한 것은 편지 내에 당시 위세를 떨쳤던 자비에르로부터 이 요정을 구해준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요정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비에르 파의 내부 배신자로 추정되는 이 인물을 칼라누스의 서자 아스파로 추측해보는 것은 과도한 논리의 비약일까요? 그러나 당시 칼라누스의 궁정 안에 자비에르가 노리는 요정을 구해줄 수 있을만큼 세력이 있으면서 '아직 사람도 요정도 죽여보지 않은 젊은이'라면 아스파가 아닌 누가 있을 수 있었을까요?

자비에르의 충실한 제자이면서 광신도 중 한 명으로 알려져온 아스파가 위험을 무릎쓰고 요정을 구해준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되물으실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 때문에 더더욱 흥미를 느낍니다. 지금까지 자비에르의 꼭두각시로밖에 알려져 있지 않던 한 인물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단초가 되는 셈이니까요. 저 개인에게 있어서는 소설의 주인공 후보가 될 수 있을만큼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고요.

세렌, 가까운 이여, 당신이 이 글을 받아볼 때쯤 나는 당신과 같은 육지 위에 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날은 영영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신부인 여신 엘레할의 많은 선물을 받은 우리들에게 있어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작별처럼 낯선 말도 없었지만, 도망치듯 뿔뿔히 흩어져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지금 전통에 따라 작별의 말을 아끼는 것 또한 합당치 않은 일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사랑스러운 당신에게 인사를 보내야 할지 펜을 잡은 손은 망설여지기만 합니다.

가까운 이여, 낯선 항구 도시의 가을 하늘 아래 우리가 함께한 수없는 밤낮들이 나의 마음 속을 스쳐가지만 여기에서 그것들에 대해 일일히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첫째는 지금 내 감은 눈 앞을 스쳐가는 모든 기억들이 사랑스런 당신의 마음 속 변치 않는 곳에도 동일하게 간직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 또한 이 땅에 앞으로 닥쳐올 시대가 흘러간 날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 회상하는 시대는 아니리라는 것을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당신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그런 한가로운 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믿고 싶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돌아올 것처럼 사람들이 서로 무릎을 맞대고 앉아 흩어져간 날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도 돌아올 것이라고요.

그러나 당신이 지금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하고 알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자비에르의 손아귀에서 탈출해 이 항구도시의 창문이 큰 방에 앉아 있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이겠지요. 이 편지가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질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에게 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당신이 반드시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렌, 내게 급히 도시를 탈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아직 사람도 요정도 죽여보지 않은 젊은이였습니다. 소문대로 당신과 닮은 분위기로 자랐더군요. 그리운 옛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바람에 떨리는 수면의 불안정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물결 아래 어떤 생물이 잠들어 있을지 우려하는 사람들은 그를 불길하다고 낙인찍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더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를 잘 돌봐주십시오.

당신이 가는 위험한 길에 대해서도 많은 불길한 말들이 떠돌고 있음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나는 파티아가 아니고 당신에 대한 파티아의 예언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미 듣고 있을 충고들에 더 많은 말을 보태지는 않겠습니다. 어두운 빛을 동반한 폭풍이 몰려오고 많은 이들이 이 땅을 떠나가는 이 때, 당신은 바람에 맞서 홀로 태풍의 눈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당신이 현명한 선택들을 내리기를, 원하는 대로 당신 자신뿐 아니라 다른 많은 가까운 이들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렌, 그리운 사람, 당신으로부터의 회신은 결코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가슴 깊이 새기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 마음에 남은 말들은 바람이 흩어가주도록 내버려두어야겠지요. 지금은 내가 떠나가야 할 시간입니다. 엘레할의 축복 아래 함께 했던 날들의 아름다운 기억은 당신의 가슴에, 다가올 어두운 날들을 위한 희미한 빛은 당신의 손에 안전히 맡기고 가벼운 마음으로 떠나가니, 슬프게 생각하지 말기를. 어쩌면 나는, 우리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지나치게 많은 것을 맡기고 떠나가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어떤 흙무리가 당신의 호수를 덮쳐오는 날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빛과 바람이 쏟아져내리던 날 엘레할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손님이었음을, 당신이 엘레할 자신으로부터 많은 특별한 선물들을 받았던 일을…

1) 당시 요정들이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댓글

로키, %2007/%10/%15 %02:%Oct:

첫 테이프를 끊으셨군요! 언어가 아주 시적이어서 읽으면서 막 두근거렸어요. '어두운 빛을 동반한 폭풍'이라든지 세렌이 '홀로 태풍의 눈으로 걸어들어가는' 이미지, '빛과 바람이 쏟아져내리던 날' 같은 표현 등..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면모와 요정 전설에 관심이 많은 마르셀의 소설가적 감성이 돋보이는 논평도 멋지군요. 기사 종류에 맞게 권위도와 연구 자금도 업데이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_엔, %2007/%10/%15 %13:%Oct:

감사합니다 >_< 예쁘게 예쁘게 써야지, 하느라고 하루 종일 걸렸어요 ㅠ-ㅠ

 
오승한, %2007/%10/%15 %13:%Oct:

아스파 엄마 = 세렌 설의 떡밥(?)이 조금씩 보입니다. '요정의 나이 같은 건 인간의 기준으로 측량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한다면 아스파와 세렌을 연결시킬 수 있군요.

글이 참 부드럽고 멋집니다. :)

(그나저나, '아스파는 자비에르의 꼭두각시나 우노스 정교회의 광신도가 아니다' 라니! 자칫하면 교회가 악의 축으로 비춰질 수 있는 위험한 발언을!(…) )

 
정석한, %2007/%10/%15 %19:%Oct:

제목이나 소재에 걸맞는 시적인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그나저나 승한 님. 악의 축 맞잖아염(…)곱고 불쌍한 요정들 다 내쫓고(…) 아아, 요정들이 이렇게 시적이고 부드러운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인줄 알았으면, 우노스 정교회 반대 찌라시나 쓸 걸 그랬습니다. 요정을 돌려달라! 돌려달라!)

 
로키, %2007/%10/%15 %22:%Oct:

편지 하나로 순식간에 여론은 요정 쪽으로 기울고, 우노스 교단은 악의 축이 되어버리다? (..)

 
_엔, %2007/%10/%16 %21:%Oct:

승한님, 석한님, 감사합니다. 저는 교회를 무자비한 아나키스트들로 몰고 요정을 아름답고 고상하게 그려내서 최대한 동정적인 여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겠어요(…)!

 
백광열, %2007/%10/%20 %01:%Oct:

계속 바빠서 글쓰는 건 손을 못대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첫 올라온 글을 읽고, 지금 다시 읽었는데 역시 좋네요. 흑;_; 너무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이에요. +_+)b

 
_엔, %2007/%10/%20 %20:%Oct:

친요정 파가 밀리고 있어요. 할루크 씨 글이 절실합니다 ;ㅁ; …칭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