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만남

건국사의 과정에서 건국왕 칼라인 듀리온전하의 주위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였고, 또 사라져갔습니다. 그중 어느 만남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좀 더 극적이거나 혹은 덜 극적인 만남은 있을 것입니다.

건국 공신인 돈울프 공과, 타이샨 출신의 상인 진 뤠이신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가히 극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의 돈울프 공은 평민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인 고속 승진을 거듭했지만 그 지위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고, 이후 왕실 회의에서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

이후 돈울프 공은 탈옥 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실로 화려한 귀환을 합니다. 타이샨에는 “금의환향”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끝도 없는 행렬과 가득한 황금을 싣고 도착했으니 그야말로 잘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그 기간 동안 돈울프 공이 진 뤠이신을 설득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한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일개 탈옥수가, 이국의 상인을 어떻게 만났으며, 또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는지의 여부는 오랜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탈옥한 돈울프 공과 진 뤠이신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어 소개합니다. 작성자인 아라드 공은 돈울프 공과 같은 아데프치오 계층으로, 이후 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만, 당시에는 평범한 상인의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략)

돈울프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다. 감옥을 떠난 순간 목숨은 버렸다. 이제와서 다시 자수한대도 죄가 가중될 뿐이다. 자신이 실각하면 애써 시작된 평민계층의 정계 진출도 영영 막히고 만다. 그렇게 주장하는 돈울프의 눈에는 묘한 열기마저 감돌았다. 수년간을 알고 지내온 터라, 이런 눈빛을 한 돈울프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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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울프가 제 멋대로 거래 장부를 살펴보기 시작한지 사흘이 지났다. 지하 창고의 안에 얌전히 숨어 있으라던 말을 무시한 채 그가 달려나온 순간, 나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거래처의 상인이 와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상대는 타이샨인이라 돈울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거래처 상인이 데리고 다니는 타이샨 짐꾼들의 얼굴이 내 눈에는 죄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여기저기에 탈옥범 수배 전단이 나붙었지만 그의 눈에는 다 비슷해 보이는 모양이다.

“아라드. 이 자 말일세. 이 진 뤠이신이라는 사람과 나를 만나게 해 주게!”

“저희 대인께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요?”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타이샨 상인, 초우가 입을 열었다. 예기치 못한 유창한 우리말에 천하의 돈울프도 잠시 말문이 막혔던 모양이지만, 금새 활력을 되찾고,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큰 돈벌이가 될 일입니다. 꼭 대인께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중략)

초우는 예상보다 조금 더 일찍 돌아왔다.

“대인께서 두 분을 뵙겠다 하십니다.”

초우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은 넓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온통 좋은 물건들로 가득해서 진 뤠이신이라는 사람의 성품을 짐작하게 했다. 부유한 타이샨 상인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인 그였지만,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반갑소이다. 내가 진 뤠이신이오.”

그렇게 소개하는 상대는 예상보다 훨씬 젊어서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데도 그토록 큰 상단의 우두머리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인께 큰 돈벌이가 될 물건을 소개하러 왔습니다.”

뤠이신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은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상인이라면 누구나 돈벌이가 될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법이다. 나 역시 돈울프의 현재 처지를 몰랐다면, 그의 말에 솔깃해했을 것이다.

“바로 에레모스 반도의 패권입니다. 내 주군이 되시는 칼라인 듀리온 전하께서는 에레모스의 지배자가 되실 분이니 지금 전하에게 투자하면 반드시 거금을 쥐게 될 것입니다.”

“허황된 말씀을 하시는구려. 칼라인 듀리온이라면 이제 제이피리스를 중심으로 한 소국의 지배자가 아니오?”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뤠이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돈울프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나머지 그만 실성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믿지 않는 것은 대인의 자유입니다만.”

돈울프는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미 에레모스 곳곳에서 분쟁이 나고 있고, 그런 분쟁에 무기와 식량을 대는 상인들이 큰 이익을 보고 있다는 것을 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미 유력한 다른 제후국의 뒤에는 거상들이 서 있습니다. 우리는 대인께서 손을 잡으실 수 있는 유일한 세력입니다.”

“조사를 많이 했구려. 그래서 요즘 타이샨의 상가들이 에레모스의 제후국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당신의 말대로 칼라인 듀리온 이외의 선택기는 내게 없겠지요. 그러나 내가 꼭 칼라인 듀리온에게 돈을 대야 한다는 이유가 있겠소이까? 십중팔구는 패망하여 본전도 못 찾을 일인데.”

“칼라인 전하께서 반도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에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전하는 지혜가 있으신 분입니다. 여러 유력 제후국은 오래된 가문 출신인데 반해 듀리온 왕국은 이제 건국한지 삼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이는 위정자가 유능한 때문입니다.

둘째로 전하는 덕이 있으신 분입니다. 전하의 수하에는 제국의 귀족 출신들로부터, 나같은 평민 출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이 있는데, 이를 모두 아우르시고 계십니다.

셋째로 전하는 하늘의 뜻을 얻으시는 분입니다. 전하께서 제이피리스의 지배자가 되신 직후, 주위 세력들이 다섯 배의 병력으로 침공해 왔으나 오히려 격퇴당하고, 그 영지는 병합당했습니다.

넷째로 전하는 백성이 따르시는 분입니다. 여타의 제후국과 달리 평민 출신이라도 재능만 있으면 발탁하여 일을 맡기시니 영내의 백성은 물론이거니와 이웃 나라에서도 귀순하는 이가 끊이지 않습니다.

다섯째로 전하가 차지하신 아킬라니는 비록 척박하고 험한 땅이지만, 그러기에 지키기에 용이한 지역입니다.

대인. 타이샨에는 천시와 지리와 인심을 두루 얻으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데도 칼라인 전하의 성공을 의심하십니까?”

유창한 돈울프의 언변에 나는 잠시 혼이 나가 있었지만, 뤠이신은 태연했다.

“비록 땅이 험하다 하나, 척박하여 병사를 기르기 힘드니 지리를 얻었다 보기 어렵고, 여러 신분 출신을 한 데 모아 놓으니 반드시 분쟁이 나는 법이오. 특히 다양한 신분을 한데 모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오?”

“남들과 같은 길을 걸으면서 어찌 남들을 누르고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례가 없기에 잘 된 것입니다. 또한 곡식과 물자가 부족한 것은 대인이 출자를 결심하는 순간 메울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단점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분쟁은? 신하들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는 국가가 흥하기는 어려운 법이오. 당장 지금도 당신이 탈옥을 하지 않았소? 돈울프 씨.”

나는 뤠이신을 속였다고 생각했지만, 뤠이신은 돈울프의 신분이나 현재 처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를 감옥에 넣은 것은 어리석은 귀족들입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 하였으나 전하의 은총으로 투옥되는 것으로 그쳤으며, 또 경비를 느슨히 해 주셨기에 탈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몸을 돌보지 않고 여기에 왔구려.”

뤠이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이샨 인은 체구가 다소 작은 편이었는데, 그는 이례적으로 체구가 당당했다.

“아랫사람을 보면 그 윗사람을 짐작하는 법이외다. 당신은 죄인의 신분이 된 다음에도 주인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 그 점만으로도 칼라인 듀리온의 그릇은 짐작할 수 있겠소이다.”

(중략)

그리하여 뤠이신은 먼저 전하께 서찰을 쓰고, 회신을 기다렸다. 그 동안 뤠이신은 여러 재물을 준비했는데, 수레가 끊이지 않아 그 부를 짐작하게 했다. 소박하던 처소와 달리, 그는 호화로운 옷과 장신구로 그 자신과 돈울프를 치장했는데,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라드 선생은 상인임에도 아직 큰 장사의 요령을 모르는구려. 많은 패물과 화려한 옷차림을 보면 사람의 시선이 한 자리에 모이니만큼 고루한 귀족들이 멋대로 돈울프 선생을 다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하여 돈울프 공은 진 뤠이신과 함께 그야말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몸을 아끼지 않은 열의와 정확한 정세 판단이 당대의 거부 진 뤠이신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건국왕 전하 역시 칭송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평민이던 돈울프 공을 기용한 것은 그분의 영단이셨으니까요. 당시 다른 제후국들이 외면하던 민중들의 움직임에 발빠르게 대응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나 돈울프 공이 제시한 다섯가지 이유 중의 세 가지 - 덕과 천시와 인심 - 은 민중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듀리온 왕국과 당시 에레모스 반도의 민중들의 만남이야말로 실로 “극적인 만남” 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역사를 움직인 만남이었으니까요.

1) 통일왕국으로 가는 길의 견해를 따름

댓글

_엔, %2007/%10/%21 %19:%Oct:

와~ 저 이 글 정말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개인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역사책스러운 어느 정도의 거리두기가 있어서 스타일?이 삽니다… ㅎㅎ 돈 울프가 다섯 가지 이유를 드는 부분이나 뤠이신이 재물을 준비하는 부분은 포풀리 씨 저번 글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 역사책의 향기가 나고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천하의' 돈 울프, '이례적으로 체구가 당당한' 뤠이신… 이런 것들은 간단한 수식어들이지만 굉장히 인상적이고 해당 인물의 매력을 잘 드러내주는 것 같아요. 뤠이신이 '돈 울프 선생'이라고 하는 것도 너무 귀엽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