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날의 이야기

“그러지 말고 초상화라도 좀 보지 그러니.”

황금같은 휴일의 독서 시간을 방해당한 나는 최대한 빠르게 훼방꾼을 내쫓기를 원했지만, 내색하지는 못했다. 상대가 너무 강력했다. 어머님이셨으니. 그리하여 매몰차게 나가라고 하지 못하고 대화에 휘말렸더니, 그 결과가 이렇다. 여기저기에서 좋은 혼담 이야기가 많으니 한번 생각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초상화라구요? 어머님.”

이런 그림 따위로 무엇을 알 수 있담! 아니, 실제로 얼굴을 보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 중에는 번듯한 미남도 많았고, 잘 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법이지만 그것뿐이다. 사람의 가치는 그 내면의 심성과, 두뇌의 우수함이 제공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그림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그래. 자 보렴.”

내밀어진 것은 엄밀히 말하면 “초상화 뿐” 은 아니었다. 그림마다 작은 종이가 철되어 있었는데, 이름이며 지위 따위가 적혀 있었다. 멋지군. 꼭 메이 퀸의 통신판매 팜플렛 같아.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 분은 아직도 직업이 없군요. 기각. 아, 상공부의 아키데인이라면 이 년전에 크게 업무 과실을 냈던 무능자잖아요. 기각. 페르너 씨… 들어본 이름인데. 아, 외무부 소속이었네요. 이 사람은 태도가 쥐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요. 기각.”

그래. 기왕에 팜플렛처럼 들고 왔다면, 철저하게 품평해주마. 물건을 고르기 전에 장단점을 따지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다.

“아이덴. 너무 그렇게 몰아세우면 이분들이 가여워지는구나.”

어머님은 금새 풀 죽은 표정이 되어버리셨다. 이 분은 마흔을 넘긴 오늘에도 변함없이 우아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럽다. 듀리온 왕가의 분가인 캐롤라인 출신의 아가씨로 곱디곱게 자라다가 그웨나라르크로 오셨으니 그야말로 왕국 제일가는 귀부인 중 한 분인 셈이다.

“가여울 것 없지요.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배로 좋은 교육을 받았을텐데도 이토록 무능력한 것은 죄악이에요.”

정확히는, 사교 댄스 연습 따위나 했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나를 “사교계의 아가씨” 로 못 만들어서 안달인 어머님께 굳이 사교 댄스 이야기를 꺼내서 득이 될 것이 없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필시 “모월 모일에 어느 댁에서 무도회가 열린다는데, 같이 가자꾸나.” 라고 나올 것이 틀림없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고, 내가 내팽개친 초상화들을 찬찬히 주워서 방을 떠나셨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금 책을 펴들었다. 요즘 학계는 유래 없이 활발하게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여러 석학들 사이에 오가는 갑론을박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일전에 듣기로는 마티아스 펜너 교수와 크리소스토무스 수사께서 도서관에서 마주쳤다가 얼굴을 붉히셨다고 하는데, 그런 소문은 대개 팔 할이 과장이니 아마도 서로간의 학문적 견해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대단한 작가로군.”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작가인데, 최근에는 “요정의 작별인사” 를 기고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평소 흥미를 갖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워낙에 화제가 된 글이라 구해서 읽어 보게 되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요정들이 쓰던 문자는 지금의 것과 다르니, 저 유려한 편지는 번역문일 것이다. 원문이 아름다울수록 그것을 번역하면 맛이 안 살기 쉬운데도 불구하고, 곱고 우아한 요정들의 속삭임 같은 문체로 되살려 놓았으니 실로 대단한 글솜씨다.

그럼에도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은, 저러한 시각이 옛 제국의 지배계층인 요정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지. 그것이 걱정될 뿐이다. 틀림없이 요정들은 우아하고, 고귀한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아마 실제로 그들과 하나의 인격체로 직접 마주했다면 나 역시 호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다. 마치 내 어머님과 같이 개인의 인품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행동 하나하나가 품위가 있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분좋게 하지만, 역사에 생산적인 기여는 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기회가 되면 이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의 역사관에 대해 논해봐야 겠다.

책을 덮고 1층으로 내려가자, 뜻밖에도 아버님께서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계셨다. 역사학회지였다! 뜻밖의 일이라 내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아버님께서는 낮게 웃으셨다.

“아이덴이로구나. 네가 요즘 이런 것들에 심취해 있다길래, 내용이 궁금하여 나도 읽어 보는 중이다. 여러 석학들의 좋은 글들이 많구나.”

내심 한숨을 돌리려는 참에, 아버님께서 다시 말을 이으셨다.

“그런데, 불온한 글도 보이는구나. 이 복스 포풀리라는 자는 사사건건 민중의 뜻이니, 시대의 흐름이니 하면서 위대하신 건국왕 전하의 업적과 여러 공신들의 공로를 평가절하하는데, 도서관 장서가 상당수 소실된 것을 기회로 이런 무엄한 글을 쓰다니. 뉘 집 자식인지 얼굴이 보고 싶을 정도다. 교육을 어찌 받았길래 이리도 사상이 불순할꼬.”

안타깝게도 좋은 교육을 받았사옵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이 댁 자식이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채, 그저 웃기만 했다. 그것이 쓴웃음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너도 이제 성인이니만큼 읽고 싶은 책은 읽어도 좋지만, 이런 불온한 글은 가급적 접하지 않았으면 하는게 부모된 심정이구나.”

“예. 아버님. 학회지를 읽을 때 이 복스 포풀리라는 사람의 글은 읽지 않겠사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학회지를 읽을 때, 복스 포풀리의 기사는 읽지 않으니까. 학회지에 실린 게 아니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내 글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이데나이 그웨나라르크와 복스 포풀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댓글

_엔, %2007/%10/%21 %19:%Oct:

아이덴 양 ;ㅁ; 감동했어요! 릴리에 대한 과찬의 말씀에 몸둘 바 모르겠나이다. 앞으로도 며칠이 걸리더라도 열심히 붙들고 써서 기대에 부응하는 글을 생산하겠습…(…) 꼭 편지를 보내주세요. 한 판 붙어봅시다(…)!

복스 포풀리 씨의 문체는 길게 늘어지지 않으면서, 뭐라고 해야 할지, 입에 쏙쏙 들어오는 리듬감이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아이덴 양의 성격이랑 잘 어울려요.

그나저나 아이덴 양은 저와 이상형이 똑같으시군요. 냐하하.

 
로키, %2007/%10/%21 %21:%Oct:

와~ 깔끔한 글. 역설적인 상황을 해학적으로 너무 잘 표현하셨네요. 다른 연구원들 얘기가 나온 점도 흥미를 자극하고요. 아이덴양 성격 넘 멋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