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날(2) : 자비에르의 비애

해마다 6월의 첫째 주, '자유의 주간'이 되면 왕국 전체는 경건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국립묘지에서 지금까지 이 나라를 지켜온 이들에 대한 추도를 하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과거 대지에 넘치는 생명력을 찬양하며 엘레할과 요정들을 기리던 방탕하고 퇴폐적인 '태양의 주간'은 오늘날 주, 데오스의 이름 아래서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선조들을 기념하는 나날로 바뀌었습니다.

마지막 날 밤이 되면 사람들은 엄숙한 분위기를 풀고 즐거운 축제를 벌입니다. 교회의 종은 밤새 울리고, 사람들은 거리와 거리에서 흥겨운 춤과 노래를 즐기며 선조들의 용기를 찬양합니다.

300년전 그 날, 우리 선조들이 엘레할의 사슬을 스스로 끊은 날을 기념하며.


케어 디나스의 목소리는 두 개로 갈라졌다.

첫번째 부류는 제국에 대한 왕국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제국의 신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무너진 질서의 회복과 분란의 종식을 주장하며 제국에 협력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부류는 우리 아데프치오들이였다. 우리는 사절을 보내 교섭을 하면서 제국의 요구조건을 최대한 완화시키자는 입장이었다. 특히 우리가 심각하게 여긴 것은 세번째와 네번째 항목이었다. 세번째 항목은 자칫하면 우리 아데프치오를 정치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었고, 와일드 헌트의 경우 요정들의 사냥을 가장한 제국의 약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전자에 비해서는 훨씬 목소리가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명분도, 군사력도 제국에 비해서 뒤쳐졌다. 지금까지 신탁을 거부한 예는 어디에도 없었을뿐더러, 현재 제국은 과거의 힘을 거의 회복한 상태였던 것이다. 돈울프 경과 진 대인마저도 '지금은 제국과 맞설 때가 아니다.' 라고 난색을 표했다.

신탁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주장하는 이는 오직 자비에르 대주교 하나 밖에 없었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왕은 단지 눈을 굳게 감은 채, 양쪽의 의견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 아라드의 수기 中 -

제국에서 내려온 신탁에 대해, 왕성의 사람들은 아라드 경의 수기에서 기록했듯이 두 가지 주장으로 나뉘었습니다. 친제국파는 지금까지 아데프치오 세력에게 넘어갔던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지 아래 신탁의 전면적 수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아데프치오들은 제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권력을 지킨다는 두 가지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대책을 간구하였습니다.

왕성의 사람들 중 자비에르 대주교만이 오직 신탁을 거부하고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것을 주장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말은 '극단주의자' '왕국을 전란에 빠뜨리기를 원하는 어리석은 교조주의자'라는 조롱과 힐책 뿐이었습니다.

이 때, 전자의 세력을 대표하는 마법사 마그누스가 아데프치오들에게 타협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그누스 경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 역시 언젠가는 우리 왕국이 제국의 위로 올라가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우리 왕의 운명입니다 - 천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이 이야기를 하는 내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제가 맹세하건대, 여러분이 이 일을 빌미로 제거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우리 왕의 소중한 신하이기 때문입니다. 와일드 헌트 역시 왕국의 힘을 꺾는 수단으로 변질될 일은 없습니다. 와일드 헌트는 오직 요정들만의 유희. 비록 요정들이 제국의 수호자일지라도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국력을 손상시키는 일 따위는 생각치도 않습니다. 마치 태풍이나 호우처럼 그들은 아무런 악의없이 단지 며칠간의 사냥을 즐기고, 만족하며 사라질 뿐입니다. 와일드 헌트가 제국에서 가장 활발하다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은 간곡했고,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주도권을 잡은 사람의 우월감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마그누스 경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끝맺었다.

”…우리 왕국은 아직 어립니다. 잠시만 머리를 숙이는 지혜를 발휘해주십시오, 여러분.”

- 아라드의 수기 中 -

마그누스의 중재안은 긴 토론 끝에 받아들여졌고, 신하들은 건국왕에게 그들의 합치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세 번째까지의 신탁은 즉각적으로 받아들인다. 단, 왕실 내각의 일정 비율은 평민을 기용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와일드 헌트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을 막기 위해, 와일드 헌트 간 일어난 피해에 대해 국가가 보상해 주는 제도를 마련한다.

셋째. 일반 백성들의 아이들 중에서 ‘공물’을 차출하지는 않는다. 버려진 아이들 중 부모를 확인할 수 없는 아이 중에서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이 보일 수도 있는 이 내용은 그 당시 요정과 제국의 명령이라면 불합리한 것이라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인간들의 비애가 담겨있는 방안이었습니다. 역시 자비에르 대주교는 반대를 하였고, 마법사 마그누스와 격렬한 언쟁을 벌이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고 국왕의 윤허를 바라는 가운데, 오직 자비에르 대주교만이 꼿꼿이 서서 다른 신하들을 비난하였다. 이에 마그누스 경이 “대주교의 말이 너무 과하시오. 폐하의 면전 앞에서 불손한 언행을 삼가시오.”라고 면책을 주자, 자비에르 대주교는 이를 갈고 발을 구르며 마그누스 경과 언쟁을 벌였다.

- 왕실 사록 中 -

이들이 어떤 언쟁을 벌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라드 경은 이 논쟁의 대략적인 내용과 마지막 모습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자비에르 대주교가 백성들의 고통과 공포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 마그누스 경은 전쟁의 위험성과 왕의 운명, 요정들과의 관계를 들며 부드럽고 신랄하게 되받아쳤다. 우리는 이 싸움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둘의 싸움은 항상 대주교가 먼저 시작했고, 마그누스 경이 논리의 헛점을 지적하며 비웃었다. 이에 자비에르 대주교가 더욱 화를 내면 돈울프 경이나 진 대인이 적당히 언쟁을 무마시키는 형태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언제나 그렇듯이 마그누스 경이 자비에르 대주교의 말을 하나하나 꼬집으며 반박하자, 자비에르 대주교는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깊은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그대의 말은 모두 옳소.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소. 마그누스, 그대는 와일드 헌트로 사랑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나에게 말한 것과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소? 내일 당장 산짐승의 밥이 되는 어린 아이에게 똑같이 말할 수 있겠소?”

나는 난생 처음 마그누스 경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머뭇거리는 마그누스 경을 지켜보면서 대주교는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마법사인 그대는 모르오. 사람들은 요정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 그들의 검과 활에 묻어있는 친지들의 피와 살점을 본다오. 사람들은 제국의 위대함, 생명과 죽음의 조화로운 균형, 영웅의 운명 같은 것은 모르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로 인해 소중한 것들을 잃어야 한다는 것 밖에 알지 못하오.”

홀은 침묵만이 가득찼다. 자비에르 대주교는 조용히 몸을 돌려 홀을 떠났다.

- 아라드의 수기 中 -

그 날부터 자비에르 대주교는 왕성 밖으로 나가 성문 앞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 묵묵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시작된 것은 6월의 첫째 주,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왕도에 모여 축제를 벌이는 ‘태양의 주간’이 막 시작된 때였습니다.(계속)

댓글

오승한, %2007/%11/%13 %01:%Nov:

계속 길어지는군요(…)

 
로키, %2007/%11/%13 %03:%Nov:

요정과 제국의 시대에 대해 꼭 필요한 도덕적 비판이군요! 어떻게 보면 인본주의와 평등 의식, 계몽의 태동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