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의 마지막 편지

자정 무렵 문득 잠에서 깼어. 차가워진 몸 위에 담요를 두르고 천막 밖으로 나오니, 달은 검은 구름 뒤로 반이나 가려졌고, 보슬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먼 바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더라. 아마도 바다 멀리 폭풍이 불고있는 모양이야.

추위와 피로 때문에 몸은 바위처럼 무거웠지만, 이미 정신은 전투를 앞둔 것처럼 예리해져 있었고, 다시 눈을 감아봐야 헛수고가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전날 밤처럼 절벽 위로 올라가 밤을 새우기로 결심했어. 불침번을 서고 있던 전사 둘이 나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손을 들어 그들을 물리쳤어.

오늘 밤은 그냥 혼자 있고 싶었어.

다 꺼져가는 붉은 모닥불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진 해안은 내게 불길한 별자리의 밤하늘을 연상시켰지만, 애써 그 생각을 떨쳐버렸어. 대신 피와 재로 더러워진 얼굴과, 사흘 동안 계속 된 전투와, 그 전부터 계속 되었던 강행군에 지친 몸으로, 명예도 명분도 사라지고,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을 그저 해나갈 뿐인 오백 명의 전사들이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파도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그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네 생각을 했어. 나의 결정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너를 생각했어. 어쩌면 화를 내거나 후회하고 있을지도, 아니면 우리 서로의 운명을 생각하며 나처럼 잠을 설치고 있었을지도 모를 너를 생각했어.

어렸을 적부터 우리의 운명은 두 가닥의 끈을 꼬아 만든 동아줄처럼 단단히 맺어져 있었지. 너와 손을 잡고, 그 당시엔 온 세상이나 다름 없었던 넓은 궁전에서 우리들만의 비밀스러운 낙원과 어딘가 숨겨져있을 것만 같았던 모험을 찾아 뛰어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방에서 천 살은 넘어보이던 늙은 점쟁이 노파를 발견했고, 그녀가 뺨을 붉게 물들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우리 둘을, 그녀가 겪어온 세월만큼이나 무한한 지혜와 슬픔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당시 그녀의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큰 기쁨이 내 가슴 속을 채우는 것을 느꼈고,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

하지만 지금 너와 맨발로 뛰어다니던 긴 해안의 어딘가에 솟은 절벽 위에 앉아, 바다 멀리 어디엔가 불고 있을 폭풍을 상상하면서, 나는 이제 우리의 동아줄이 두 가닥으로 풀려가고 있음을 알았고, 성난 바람과 미친 파도가 둘로 나뉜 우리의 운명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지켜볼 수 밖에 없음을 알았어. 왜냐면 우린 스스로가 가슴 깊이 믿고 있는 것을 선택했고, 옳거나 그른 선택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으며, 오직 그 순간 각자가 할 수 있었던 최선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어쩌면 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미 저 별자리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나는 너처럼 영리하진 않지만, 내 마음 속에 살고 계시는 반듀아는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니까.

하지만 너의 명령을 받고 팔백 명의 전사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 마침 동쪽 수평선 위로 동이 트고 있었고, 태양이 너와 내가 어릴 적 함께 놀던 해안가를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그 순간 나는 그 오래된 해안에서 너와 나, 혹은 너와 나의 조상, 혹은 그 조상의 조상일지도 모를 붉은 머리의 소녀와 갈색 머리의 소년을 본 듯 했고, 곧 내 곁에 서있던 다른 전사들도 멀어져가는 해안을 바라보며 나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