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저주

지난번 글 요정의 질책에서 소개한 요정의 알현 장면에서 요정의 비난 다음에 이어진 저주는 아스파 엔듀리온과 연관이 깊다. 필자는 요정—편의상 블로딘1)이라고 칭한다—이 말한, 왕의 파멸이 될 '신성한 혼인의 결실'이 바로 아스파라고 감히 주장한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근거는 혼인의 결실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녀라는 평범한 일반론이다. 폐하와 이렌가르드 여왕의 혼인은 이 알현보다 훗날의 일이므로 당시 폐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은 아스파 엔듀리온, 듀아라르크뿐이다. 그 외에도 요정과 관련이 깊으며 폐하의 친우인 마그누스와 세렌이 아스파의 후견이었다는 점이나, 라인부르크 무예의 축전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인 초자연적 무공2)을 보면 아스파는 요정의 가호가 따랐거나 요정의 피가 섞였다는 추측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정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3) 부왕에게 받은 검이 다시 하나로 벼리어진 후 붙인 이름이 요정의 성지와 같은 '시글렌'이었다는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다음은 칼자루에 새길 문자 도안을 만들었던 아넬리아드가 도안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바드와 요정들이 쓰는 '나무의 룬'으로 '시글렌'을 표기하고 있다.

'시글렌'

물론 신성한 혼인의 결실은 실은 전혀 다른 뜻이었다거나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칼라인 폐하의 다른 자녀였다거나 하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바로 아스파가 요정이 내린 운명의 저주, 칼라인 폐하의 파멸이라는 것이다.

블로딘신성한 혼인의 결실이 아스파라는 가설에 대한 최대의 반론은 아마 블로딘이 한 바로 다음 말, 즉 아스파를 가리켜 '저주스러운 태의 더러운 소생'이며 '벌레 같은 후레자식'이라고 모욕한 점일 것이다. 요정인 그녀가 어찌 엘레하의 아들인 아스파를 저주받은 태의 소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성한 혼인에서 태어난 아들을 후레자식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나 이 반론도 두 가지를 고려하면 해결할 수 있다.

첫 번째, 르위드 경의 글에서 알 수 있듯 엘레할과 치르는 혼인 의식에서 실제 여신의 역을 맡는 것은 보통 요정 처녀이다. 즉 블로딘이 말한 '저주스러운 태'는 대지의 엘레할이 아닌 그 대역이었던 실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해석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알현 장면의 맥락상 '저주스러운 태'의 주인공, 즉 아스파의 어머니는 칼라인 폐하와 관계가 깊은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잠시 마르셀 프루스트요정의 작별인사를 떠올려 보자. 그 글에서 소개하는, 한 요정이 세렌 경에게 보낸 서신의 마지막 문장은 '당신은 빛과 바람이 쏟아져내리던 날 엘레할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손님이었음을, 당신이 엘레할 자신으로부터 많은 특별한 선물들을 받았던 일을…'이다. 어째서 엘레할의 혼인에 참여한 일이 그렇게 특별한 선물이었을까? 어쩌면 세렌 경은 엘레할의 결혼식에 초대된 가장 특별한 손님, 즉 엘레할 자신의 대역이자 아스파의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아직은 가설일 뿐이지만 지금까지의 자료로 비추어보면 앞뒤 정황상 모순이 없고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두 번째, 블로딘이 아스파를 후레자식이라고 부른 것은 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칼라인 폐하께서는 이미 엘레할을 부인하셨으므로 엘레할과의 혼인은 해소된 상태였으며, 따라서 아스파는 혼외의 자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게다가 세렌이 아스파의 어머니였으며, 칼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세렌을 블로딘이 혐오했다고 하면 폭언을 쏟을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

이렇듯 검은 왕자가 신성한 혼인의 결실이며 건국왕의 파멸이라고 한다면 '운명의 실에 엮여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블로딘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부왕의 파멸이 되리라는 운명 실에 묶여 원하든 원치 않든 운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는 조롱을… 이렇게 본다면 아스파가 검을 뽑을 정도로 동요한 점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는가. 또한, 데오스의 선물인 자유의지로 어떤 사슬이라도 끊을 수 있다는 자비에르의 말에 관심을 보인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장면은 검은 왕자가 자비에르 대주교와 가까워진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블로딘이 말한 칼라인의 파멸이 아스파였다면, 요정이 예견한 파멸의 방식도 짐작할 수 있을까? 필자는 추측할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정이 칼라인 폐하를 힐난한 근거는 바로 엘레할과의 혼약을 어겼다는 것이었으며, 엘레할의 법도에 따르면 새 왕이 그를 대체할 수 있었다. 요정이 왕에게 한 저주의 말을 자세히 보자. '이 땅의' 축복으로 예비되었던 신성한 혼인의 결실이 '그대의,' 즉 칼라인의 파멸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르위드 경이 소개하고 있는 혼약 위반의 법도와 겹치는 데가 보인다. 옛 왕이 어겼던 혼약을 새로운 왕이 회복하여 대지, 즉 엘레할의 축복이 되고 옛 왕, 즉 칼라인을 파멸시킨다고 해석하면 '이 땅의 축복'과 '그대의 파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즉, 앞뒤 정황을 보면 요정의 저주는 아스파 엔듀리온이 부왕을 살해하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를 죽이는 운명이야말로 그가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 블로딘이 비웃은 운명의 실가닥이었던 것이다.

운명을 보는 능력이 없는 필자는 그것이 실제로 아스파의 운명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그렇게 믿을, 어쩌면 확신할 근거가 있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특히 그것이 아스파의 두려움이었다고 한다면 불살 장군으로 후대에 남은 그의 행적을 설명할 수 있기에 이는 더욱 매력적인 가설이다.

왕을 세우는 고대 의식에서 왕이 되려는 자는 숫사슴을 죽여야 한다는 언급은 르위드 경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숫사슴은 왕관 쓴 왕을 상징하므로 이는 한편으로는 옛 왕을 폐하고 그 자리에 오른 새 왕의 위치를 상징하기도 하나, 르위드 경은 그 뒤에 숫사슴 사냥의 의미를 더욱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전략) 왕이 숫사슴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아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남자는 죽음과 욕망과 새로운 생명이라는 필연적인 순환을 완성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어린아이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사냥꾼으로서 가족을 먹이든 전사로서 땅을 지키든 생명의 남성적 원리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얽혀 있었으니, 스스로 생명을 취하는 행위의 무게를 모르는 자는 왕도 될 수 없었다.(후략)

사슴다시 말해 자기 손으로 살생을 하지 않으면 왕이 될 자격조차 없었으므로, 요정 여인 블로딘이 말한 운명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스파는 불살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며,4) 사람이나 요정을 죽인 일이 없었다.5) 살생을 꺼려하는 점은 그와 부왕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었으며, 피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조롱을 부르기도 했다.6)

라인부르크 무예의 축전에서 우승할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으며7) 성인이 된 후에는 독립 전쟁에도 참전한 아스파 엔듀리온이 무인으로서 매우 드물게도, 그리고 조롱과 빈축을 사가면서까지 살인을 꺼린 이유는 부왕을 폐하고 그 자리에 오르는 운명을 벗어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하면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진정 피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바로 부친의 피를 흘리는 것을. 꽃으로 만든 환술이었던 블로딘이 그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말을 하기 전에 굳이 그의 칼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도 살생이 저주와 운명의 실마리였다는 추론을 뒷받침한다.

필자의 가설이 옳다면 검은 왕자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운명에 휩쓸린 무력감, 아버지를 시해하는 운명을 피하려고 바로 그 아버지에게 몰이해를 감수해야 하는 외로움,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확신할 수 없는 불안이 젊은 그를 끝없이 괴롭혔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 역설이라면 그 저주는 현실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저주를 피하려는 아스파의 행동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의 화근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블로딘은 목적을 상당 부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아들에 대한 칼라인의 오해 자체가 어쩌면 왕국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칼라인 폐하도 어쩌면 300년 전 필자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비록 공명정대한 왕이었던 그는 그 예언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겠지만, 알게모르게 그 예언이 아스파에 대한 건국왕의 불신을 유도했다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정의 저주가 실제 위력이 있었든, 아니면 그 저주에 대한 믿음 자체가 효과를 발휘했든 왕도, 왕의 아들도 결국은 불안한 미래 앞에 고민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시간을 넘어 그들을 인격체로 가깝게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불행한 미래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면 느끼는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기에.

댓글

정석한, %2007/%11/%04 %12:%Nov:

드디어 요정과 아스파 간의 관계, 아스파가 제거당한 이유 같은 굵직한 이야기가 밝혀졌군요! 그간의 불살 장군 아스파의 이미지가 구축되었는데 그 이유도 명확하게 드러나고, 뭐랄까. 그동안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제시되면서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 로만 표현되던 여러 특성의 이유가 드러나서 좋습니다.

 
_엔, %2007/%11/%04 %17:%Nov:

전 사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취향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근거를 드는 것도 재미있고 좋군요. 세렌-아스파의 관계와 자비에르-아스파의 관계 등 제가 꼭 한 번쯤 다뤄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던 주제들에 대해 언급해주셔서 기쁩니다. 숫사슴 사냥의 의식과 같은 것은 우노스 정교회가 들어서기 전 인간들 사이에 퍼져 있던 요정들의 문화와 같은 느낌을 주고요. 마지막 결론은 은근히 펜너 할아버지스러운 면이 드러나 있어요. (그나저나, 아아아씨 초 유능!)

 
_엔, %2007/%11/%04 %18:%Nov:

일단 연표에는 마음대로 추가했는데 틀렸으면 바꿔주세요 ㅡ

 
오승한, %2007/%11/%05 %11:%Nov:

아스파의 고뇌를 명확하게 표현해주신 점, 그리고 자비에르와 아스파를 연결시킬 소지를 만들어 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

 

Fatal error: Allowed memory size of 50331648 bytes exhausted (tried to allocate 42 bytes) in /web/home/eldir/html/wiki/inc/auth/plain.class.php on line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