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黑)과 적(赤)

벽난로 불이 등뒤에 뜨겁다. 몸 앞으로는 아내의 체온이 부드럽고 흔들림 없는 온기로 그를 감싼다. 칼라누스는 체통없이 바닥에 앉은 채, 의자에 앉은 아내의 무릎에 기대있다. 아내는 아무말 없이 그녀의 무르팍에 펼쳐진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긴 머리가 그의 머리칼에 섞여들어 칠흑 속에 긴 불꽃색 빛줄기를 만든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오래 전 검은 하늘에 휘감겨오던 여명의 붉은 빛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붉은빛 섞여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흙과 이끼 냄새 가득하던 동굴에서 방금 나와 몸은 흙과 물감투성이에 머리는 헝클어져, 지치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던 젊은이를. 그 전날 밤에는 엘레할의 신성한 신랑이었으나 아침에는 전날 밤에 겪은 끔찍하고 달콤한 폭풍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직 소년에 더 가까운 청년일 뿐이던 그를.

그날 새벽, 그 산등성이에 서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던 기억은 평생 처음 여자를 안았었다는 사실. 하다못해 한 마디 얘기라도 나누게 해줘요! 심지어는 이름도 모르는데…! 아냐, 엘레할 같은 게 아니었어… 진짜 여자였다고요! 태어난 날 받았던 검을 돌에 내리찍어 부러뜨리는 순간 어깨까지 얼얼하던 충격. 그때는 얼마나 지독하게 어렸던가. 어떻게든 그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열병이 들뜬 꿈이 아니라는 증거를 남기려고 그렇게도 필사적이었었다.

아이가 생긴다면 이 검을 전해줘요. 아귀가 맞으면 알아볼 수 있으니까! 쿤룬의 아들 칼라누스를 찾아오라고 해요… 약속해요! 그리고 산의 뿌리처럼 거대하고 이질적이던 그 침묵 앞에서 도망치듯, 부러진 칼날을 들고 산등성이를 내달렸었다.

벽난로 불이 따뜻하고, 아내의 체온은 포근하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이렌가르드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불빛에 살짝 홍조를 띈 투명하도록 하얀 피부, 조각한 듯 수려한 얼굴. 불 속에서 무엇을 보는지 녹회색 눈은 벽난로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얼굴. 그 뒤에 숨은 복잡하고 세련된 여자는 그에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다.

바다 저편으로 사라져간 그녀의 전사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와 결혼하려고 그녀는 바다의 여신을 버렸고, 바다의 전사는 수백을 이끌고 그녀를 떠났다. 약해진 왕국과 저버린 신의 속에 그녀는 말없이 슬퍼하는 걸지도. 가슴이 아파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자비에르 주교는 이교도 왕비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했고, 돈울프는 내분 없이 강성한 벨가스트는 위험하다고 했고, 그녀는 그에게 타인이다.

어쩌면 그는 이렌가르드를 질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스리려고 태어난 사람, 고귀한 혈통의 당당한 기품과 확고한 목적의식 앞에 설 때마다 그는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다. 황폐하고 비루한 아킬라니에서 칼재주를 팔던 청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의기와 혈기만 넘쳤던 촌뜨기에게 그 많은 사람이 쏟는 신뢰는 사실 엄청난 착각일 뿐이라는 불안은 아직도 순간순간 엄습해온다. 그래서 다스릴 자격은 그저 기정사실일 뿐, 증명해보일 필요조차 없는 해적 여왕의 자신감은 그로서는 죽는 날까지 가질 수 없는 것.

그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아내는 나직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그는 따스한 치마폭에 고개를 묻은 채 귀기울인다. 낮고 듣기 좋지만 특별히 맑거나 아름답지는 않은 목소리에 왠지 마음이 편하다. 이건 이렌가르드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노래다… 파도가 철썩이고 바다의 적막이 울리는 반트족의 자장가.

아내보다도 아내의 아이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일이다. 그의 혈육이 아닌 아들과 딸, 붉고 노란 머리의 브란과 리에하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하긴, 예의바르고 쾌활한 아이들을 좋아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바빠지거나 시끄러워지면 유모에게 넘기면 그만이고, 먹여살릴 걱정도 없는데. 그렇다 해도 누군가의 아버지라는 기분은 새롭고 묘하다.

아스파에게는 한 번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엄숙하고 선한 눈빛을 한 채 소년기와 청년기의 불안한 경계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낯선 젊은이. 아무리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도 좀처럼 깰 수 없는 마음과 언어의 긴 침묵. 그는 아스파의 어린시절을 모른다. 브란처럼 밤에 악몽을 꾸며 깨어나곤 했는지, 리에하처럼 먹기 싫은 야채를 개에게 주어서 몰래 처리하려 한 적이 있는지. 그의 피를 이은 아들이 낯선 사람이라는 아픔만큼이나 이렌가르드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고통스럽도록 달콤하다.

저녁이 깊어가던 시간, 브란과 리에하가 자러 가기 전에 재간꾼 롭트 이야기를 해주던 아내가 떠오른다. 눈의 여신을 웃게 하려고 롭트가 염소의 뿔에 고환을 끈으로 묶고 요란법석을 떨다가 여신의 무릎 위에 엎어지자, 결국 눈발처럼 차갑던 여신은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자비에르가 들었으면 아이들에게 그런 음탕한, 그것도 거짓 신들 얘기를 한다고 질색을 했겠지만 칼라누스는 아이들과 이렌가르드와 함께 마음껏 웃었었다. 모두 이 작은 반항의 공모자가 되어… 자비에르는 재간꾼 롭트의 장난질만큼이나 아킬라니의 봄의 제전도, 붉은 꽃치장한 아가씨들도 죄라고 하겠지. 데오스께 바쳐진 이 신성한 나라의 왕과 왕비는 지나간 시대에 살아가는 야만인이라니 이 무슨 웃기는 일인가. 그렇다 해도 이 내밀한 시간마저 사제들에게 참견받느니 지옥에나 떨어지는 게 낫지.

잠시 아이같은 반항심과 벽난로 온기와 따스한 웃음에 취한 칼라누스는 롭트가 어떻게 했는지 보여주겠다며 이렌가르드 앞에 주저앉아 그녀의 무릎을 와락 껴안고 장난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브란과 리에하가 깔깔거리는 동안 칼라누스와 이렌가르드의 웃음은 차차 잦아들었고, 부부는 잠시 굳어 서로 마주보았다. 불가에서 꼬박꼬박 졸던 반트인 유모는 무슨 불가사의한 감각이라도 있는지 퍼뜩 깨더니, 두 사람 눈치를 보며 놀라운 속도로 아이들을 모아 데리고 나갔다. 어쩔줄 모르고 어색하게 이렌가르드를 올려다보다가 칼라누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의 무릎팍에 뺨을 기댔고, 이렌가르드는 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버지가 된 것이 처음이듯 남편이 되어본 것도 처음이다. 엘레할에게는 많은 신랑은 있되 남편이 없으며, 그의 세렌은 연인, 혹은 꿈, 혹은 중독일 수는 있어도 아내일 수는 없다. 의무와 정치와 관습에 묶여 두 낯선 사람이 함께하고, 서로 익숙해지려고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기묘한 인연, 이 결혼이라는 것.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이 낯선 여인하고 친밀감과 낯섦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는 삶을 나누고 있지도 않겠지. 그녀의 아이들이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일도 없고, 지금 무릎에 얼굴을 묻은 여자가 정말로 누구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겠지. 그녀도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까. 그와 마찬가지로 불안해하며, 설레이며.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폐하.”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세피루스입니다. 송구하오나 돈울프공이 급히 뵙기를 청하여서…”

이렌가르드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더운 불 앞에서 너무 오래 앉았는지 순간 조금 어지럽다. 잠시 그녀를 말없이 마주본다. 그들이 함께한 말없는 친밀의 시간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모른 채, 긴 여정에 첫 발을 함께 내딛은 동지의식과 어색한 낯설음 사이에서.

“알았다. 곧 나가겠네.”

돈울프가 허튼 일로 이 시간에 그를 보자고 할 리는 없다. 마음은 익숙하게 위기와 가능성과 선택지를 가늠하며 사슴처럼 저 앞으로 내닫는 동안 칼라인은 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문간에서 그는 잠시 멈칫하며 돌아본다.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는 눈빛을 마주치자 갑자기 그는 불빛 속에 붉고 희게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에서 먼 훗날을 본다. 붉은 금처럼 흐르는 머리는 잿빛으로 세고 매끄러운 피부는 낡은 양피지처럼 늘어진…

세렌과 마그누스가 아직도 젊고 아름다울 날에 죽음의 그림자를 차분하게 마주할, 그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이기지 못할 덧없고 불완전한 그녀를 향해 그는 갑자기 따뜻한 애정이 솟는다. 그는 결국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세상만 충분하다면. 그는 살짝 목례하고, 이렌가르드는 작게 미소짓는다. 언제 돌아오든 그가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릴 그녀와 의논하고 심사숙고할 생각에 어깨가 조금은 가볍다.

그는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썰렁한 복도로 걸어나간다. 그가 지키려고 싸우는 나라에 무엇이든 덮쳐올 수 있는 그 차가운 세상 속으로… 하지만 등뒤에는 아직 희미하게 벽난로의 온기가 남았고, 그의 등뒤를 지켜줄 사람이 그를 기다린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