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리온 국왕, 나의 동생에게

통일과 독립 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왕국의 평화를 깬 것은 오늘날 '벨가스트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몇 년을 끈 이 전쟁으로 벨가스트는 거의 초토화되었고, 벨가스트 왕가는 사형당하거나 유배당했으며, 벨가스트는 '반역의 고장'으로 낙인찍혀 오늘날까지 그 출신은 차별받고 있다.

주류 역사에서 흔히 '벨가스트의 난'은 그 이름처럼 반란으로 묘사하지만, 과연 그것이 당대의 실제 상황이었는지는 심각한 의문이 있다. 당대의 자료를 보면 '벨가스트의 난'이라고 후대에 전해지는 이 사건은 반란으로 시작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벨가스트 독립 선언에 대한 실록을 보자.

건국왕 폐하의 서거 후 벨가스트 왕자1)인 아곤의 아들 브란이 '듀리온 국왕이며 나의 동생인' 칼라인 2세께 전령을 보내오도다. 브란은 스스로 '벨가스트 국왕'이라 칭하며 벨가스트가 듀리온에서 독립할 것을 선포하니, 폐하께서 이르시되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전령이 말하되 나의 주 벨가스트 국왕의 뜻이나이다.

강력한 동맹이었으며 칼라인 폐하와 이렌가르드 여왕의 결혼으로 한 나라가 된 벨가스트의 독립 선언은 칼라인 1세의 서거로 위기를 맞은 듀리온 왕국에 치명적인 소식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벨가스트가 분리하면 아직 젊은 왕국은 자칫 와해될 위험이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나 과연 이를 가리켜 반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벨가스트는 처음부터 스스로 독립 왕국이며 대등한 동맹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했으며2) 그 이후에도 이렌가르드 여왕이나 다닐 장군, 브란 왕자가 듀리온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에 더해 반트족의 전통 혼인법을 보면 브란이 벨가스트 독립을 정당하다고 생각한 근거를 알 수 있다.

무릇 여자가 혼인하되 지아비가 내치거나 혼인이 종료하면 여자는 자유롭게 그 친족에게 돌아올 것이며, 남편의 집안으로 가져갔던 지참금과 혼수도 다시 가져오는 것이 옳다. 만약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뻐하지 않으면 그 친족이 혼인이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를 보이고 여자가 가져갔던 재물을 돌려받을지라.

이것은 혼인관계가 종료한 여성의 신변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며, 여자가 시댁에 남는다고 해도 친정의 재산이 영구적으로 감소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전통 법규이다. 즉, 벨가스트 측에서 해석하기로는 벨가스트 여왕 이렌가르드가 칼라인 1세 폐하와 혼인하면서 벨가스트를 지참금으로 가져갔으나, 칼라인 1세의 죽음으로 벨가스트를 다시 찾아올 권리가 생겼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게다가 충성의 맹세를 어긴 일도 없고 듀리온 왕국을 공격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반역이라는 주장은 더욱 근거가 약해진다.

벨가스트가 역모를 꾸몄다기보다는, 독립성을 완전히 포기한 적이 없었던 왕국의 평화로운 분리 선언이 이후 벌어진 비극으로 인해 반란의 오명을 썼다는 해석이 더 이치에 맞다. 벨가스트 독립 선언이 갓 왕을 잃은 듀리온 왕국에 심각한 위기였던 것은 분명하나, 바로 뒤이은 칼라인 2세의 죽음은 두 왕국 모두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으로 남았으니… 다음은 아라드 공의 수기이다.

칼라인 2세 폐하, 부왕과 구분하느라 마나 왕자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 분을 마지막으로 살아서 뵌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강력하고 현명했던 두 군주를 부모로 둔 분답게 그분은 왕국이 무너질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벨가스트에 사절을 보내시어 브란과 직접 대면할 회담 위치를 주선하신 후 여신 마지막 조정회의가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그러면 짐은 라겐하임에서 형님을 뵙고 올 터이니, 그동안 공들이 수고해주십시오.”

“폐하!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정세가 불안정한데 직접 가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다니엘 공은 반대했지만, 칼라인 2세께서는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함께 자란 형님입니다, 다니엘공.”

흔들림 없는 말투는 선왕 폐하를, 부드러움은 이렌가르드 대비마마를 그대로 닮아 있는 그 모습에 옛 기억이 얼마나 스쳐가던지!

“직접 만나서 얘기하면 분명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분들도 많이 참아오셨지요.”

폐하께서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듯 쓸쓸한 눈빛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 불만을 다독이기에 늦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형님과 다닐 삼촌도 바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외교상 전략이라는 말씀입니까.”

돈울프 공은 예상했다는 듯 예사로운 말투였습니다.

“형님 역시 군주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자비에르 왕자는 영특하지만 아직 어리니… 그리고 어머님 역시.”

선왕 폐하의 서거 이래 계속 병중이신 대비 마마 생각에 중신들은 숙연해졌습니다. 회의를 파하고 폐하께서 대비 전하를 뵈러 가시는 뒷모습은 어깨가 무거워보이면서도 얼마나 당당하셨던지요.

그렇게 호위선 수 척을 동반하고 출발하신 폐하께서 라겐하임으로 가는 항햇길에 유테리아 해역에서 시해당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들의 경악과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반트족의 수법대로 배를 갈고리로 걸어 끌어들이고 선원들을 살해한 후 불을 지른 흔적이 남았으니… 브란은 극구 결백을 주장하며 동생을 살해한 비겁자들을 찾아서 벌할 기회를 달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아버지를 갑작스레 여의고 슬픔에 빠진 어린 칼라인 3세 폐하께서는 부왕을 살해한 벨가스트의 역도들을 징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 없이 하는 벨가스트 침공을 반대하는 신하도 일부 있었으며, 특히 대비 전하의 호소 이후 중신의 여론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돈울프공은 폐하의 명을 묵묵히 추진했으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어느날 조정 회의 후에 재상을 따라잡아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공께서도 대비 전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까? 브란이 선왕 전하를 시해했다고 보기에는 정황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왕국의 모든 지방에 설명할 수 있겠소? 그들은 모두 선왕 폐하가 벨가스트의 브란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있소.”

돈울프공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목소리는 딱딱했습니다.

“지금 빠르게, 결단성 있는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왕을 연이어 둘 잃은 듀리온은 치명적으로 약해 보이고 맙니다. 벨가스트 외에 다른 지방의 준동도 이미 보고되고 있는 차에, 강한 행동력을 보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왕국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오.”

그 말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정말로… 왕국이 그렇게 위험하단 말입니까, 재상? 그러나 그렇다 해도 본보기를 보이고자 벨가스트를 침공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전쟁이 우리를 찾아왔소.”

돈울프공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비탄이 섞였습니다.

“또한 어떻게 폐하의 명을 거역할 수가 있겠소. 신하된 도리로…”

그는 눈빛이 차가워지며 돌아섰습니다. 순간 나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선왕을 연달아 둘 잃고 소년 왕자가 왕위에 오른 지금, 신하들의 저항으로 왕이 약해보이는 것은 곧 듀리온이 약해보이는 결과라는 것을. 공의 말대로 원하든 원치 않든 전쟁이 우리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벨가스트 독립 선언에 바로 이어진 칼라인 2세 폐하 시해 사건은 신생 왕국에 엄청난 재앙이었고, 듀리온 2대 국왕의 죽음의 진상이 어땠든지 주변 상황으로 인해 전쟁은 피하기 어려웠다. 즉 흔히 말하는 '벨가스트의 난'이란 실은 벨가스트의 독립 선언과 이에 뒤이은 칼라인 2세의 죽음, 그리고 이로 인한 불안한 정세와 어리고 경험 없는 왕에 의해 상황상 피하기 어려웠던 듀리온의 벨가스트 침공이라는 일련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중 시발점이 된 벨가스트의 독립 선언은 이미 설명했듯 법적으로 정당화할 여지가 있었으며, 아라드 공의 수기에서 볼 수 있듯 칼라인 2세와 돈울프 재상은 그 자체가 정치적 이득을 얻어내려는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칼라인 2세는 브란을 '형님'으로, 혈연이 없는 다닐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벨가스트가 듀리온에게 정당한 불만이 있다고 내비쳤으니, 독립 선언 그 자체를 반역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시대를 실제 살아갔던 인물들의 인식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라드 공의 수기를 보면, 훗날 칼라인 3세에게서 국정을 장악하려고 했던3) 돈울프의 행적도 벨가스트 침공에 대한 국왕의 판단에 대한 의문이 원인이었다는 추측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벨가스트가 반역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칼라인 2세 시해 사건인데, 이에 대해서는 칼라인 2세의 죽음이 벨가스트와 무관했다는 근거 자료, 바로 아라드 공의 수기에서 언급만 된 이렌가르드 여왕의 호소에 대한 기록을 최근 제공받아 차후 기사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사료를 제공해주신 아이데나이 그웨나라르크 양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또한, 칼라인 2세가 암시한 벨가스트의 정당한 불만에 어떤 것이 있었는지도 연구를 통해 실마리가 잡히고 있으니 완성하면 기사에 발표할 예정이다.

1) 이 호칭 자체도 완전히 속령이 아니었던 벨가스트의 모호한 위치를 나타내는데, 성년이 되어 벨가스트를 통치하기 시작한 브란 아곤슨의 칭호는 벨가스트의 '영주'나 '군수'가 아닌 벨가스트의 왕자 (Prince of Belghast)였다.

댓글

로키, %2007/%11/%05 %08:%Nov:

벨가스트의 난 첫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더불어 아라드 공도 써먹어봤어요. 돈울프 공과 친하면서도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돈울프의 친절한 설명(?)을 듣기에 좋겠더라고요. 회의를 통해 기사 사이 모순을 해소하고 연표를 정리하신 뱀프님과 엔님께 감사드립니다~

 
오승한, %2007/%11/%05 %09:%Nov:

"자비에르는 영특하지만 아직 어리니…"는 무엇입니까!;;;;

 
로키, %2007/%11/%05 %10:%Nov:

아, 그건 자비에르가 요정들의 장난으로 회춘해서..가 아니고! 칼라인 3세의 풀네임은 '칼라인 자비에르 ~~~~'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칼라인 3세 설정 참조! 명확해지게 '자비에르 왕자'라고 추가했습니다.

 
_엔, %2007/%11/%05 %11:%Nov:

벌써 올리시다니! 아침부터 두근두근했어요. 드디어 벨가스트의 난이 시작되는군요. 앞으로 다른 분들도 많이 이 설정 써먹으시겠죠? 아스파와는 또 다른 성격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성격의 인물인 마나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입니다. 죽음이 비극적이라서 마음에 들어요 ;ㅁ; 그리고 돈울프공의 친절한! 설명 잘 들었어요.

덧. 저 갑자기 마나는 사실 죽지 않았고 요정들이 데려갔다던지, 최후의 순간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자 빛이 내려오면서 승천(…)했다던지 하는 글이 쓰고 싶어졌어요. 이건 마르셀 프루스트 1호기적인 글이려나요.;

 
정석한, %2007/%11/%05 %17:%Nov:

엉엉. 이틀 사이에 세 개라니요! 40번 뺏기고 상심한 복스양 (…)

이번 글을 계기로, 벨가스트 최후의 해전을 다루어 보았지만, 역시나 아쉽습니다. 해전 어려워요. 엉엉.

 
로키, %2007/%11/%06 %02:%Nov:

_엔/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이번에 새로 쓴 망상에는 어린 시절의 마나도 잠시 나온답니다.

뱀프/ 음하하..(?) 해전 글도 잘 봤습니다. 세렌의 결전도 보게 마나 탄생을 서둘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