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오오, 해방의 날은 꿈꾸듯이 끝나버리는가.

저 간악한 북방의 세 군주가

양떼를 노리는 흉포한 이리 떼와 같이 공모하여 일어남이라.

십만의 군세가 갓 자유를 얻은 제이피리스를 늑탈하려 몰려오나니

혼인날 신부가 발가벗긴 채 강도들에게 내몰림 같도다.

저들이 엘레할의 징벌을 내세우며 연합군이라 칭하나,

아킬라니의 숨통 제이피리스를 탐하며 물욕에 눈이 멀었을 뿐.

게걸스런 승냥이요 썩은 고기에 굶주린 까마귀로다.

– 영웅왕 칼라인의 음유시인이자 궁수였던, 아넬리아드 아프 아위르의 “해방의 노래” 中

필자는 이미 오직 사람들을 지키기 원했던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의 진의를 소개한 바 있다1) 이번에 제이피리스 전투를 조사하는 가운데, 더욱이 우리가 모두 흠모해마지 않을 영웅왕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어 이를 모든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다음은 제이피리스 혁명정부의 서기였던 세피루스 (그렇다, 바로 후에 왕실 서기가 된 바로 그 인물이다)가 남긴 회의 기록이다.

북서부의 포르투스 백작, 벨레그 자작, 그라녹스 남작의 연합군이 마침내 출진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성내 분위기는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이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이 가운데 마침 난세에 주군을 찾으며 떠돌던 지략가 돈울프 공이 제이피리스 성을 방문했다.

“영웅 칼라인이여, 북서부 대영주들의 연합군을 물리칠 유일한 계책을 갖고 왔소.”

좌중은 저가 누구기에 십만에 달한다는 연합군을 물리칠 방법이 있는가 하는 의심, 그리고 실낱 같은 희망과 기대로 술렁였다.

“저들이 연합군이라 칭하고 있으나, 실상은 모두 자기 뱃속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야심가들. 제이피리스를 차지하자마자 곧 서로를 대해 이빨을 드러내며 싸울 게 틀림없소.”

“그러니 이야기는 간단하오. 북서부의 제2인자인 벨레그 자작에게 비밀리에 전갈을 보내, 그에게 성을 내주고 정예 병력만을 추려 피신하시오. 성미가 불 같고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불곰 포르투스 백작은 이를 갈다가, 끝내 반역자 칼라인을 숨겨두고 있다는 의혹을 내세우며 벨레그 자작과 싸울 거요. 이때 그라녹스 남작을 꾀어 비어있는 포르투스 백작의 영지를 치게 하면, 세 영주 간에 다시 없는 처절한 전쟁이 벌어질 것이외다. 그동안 힘을 기른 당신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 비어있는 영지들을 손에 넣고 이 지역을 통일하게 될 것이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모두가 이 놀라운 지략에 감탄을 마지 못했다. 마치 폭풍우에 휩쓸려 침몰하는 것이 시간문제인 배가, 저 멀리 등대불빛을 발견한 것 같을까. 아니 그조차도 모자란다. 그 누가 연합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 아킬라니 지방의 병탄을 상상했단 말인가. 그러나 칼라인의 얼굴에는 어둡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대의 책략은 받아들일 수 없소.”

그 짧고 침중한 한 마디 외에 다른 설명은 없었다.

“다른 더 훌륭한 비책이 있으시단 겁니까?”

“없소. 아마 그대의 책략만한 것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그대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소.”

돈울프 공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혀를 차며 돌아간 뒤, 분위기는 적막했다. 기실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허락만 떨어지면, 다시 나가 돈울프 공을 모셔오려는 듯 했다. 칼라인의 벗이자 충실한 조언자인 마그누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왜 거절한 건가? 그만한 꾀는 내가 생각해도 별로 없는데.”

칼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나아가며 나직히 답했다.

“그의 말은 내겐 가장 유리하지. 하지만 여기 제이피리스 사람들은 침략군의 발 아래 신음하고 대영주들 간의 피투성이 전쟁에 휩쓸리겠지. … 난 이 도시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올랐지, 그들을 저버리고 왕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닐세. 피 흘리는 것은 내 몫이네.”

칼라인이 돈울프 공의 제안을 거절한 이야기가 성내에 퍼지면서, 시민들의 마음은 다시금 영웅왕을 향한 불길 같은 충심과 뜨거움으로 불타올랐다. 새 영주는 결코 그들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 놀라운 믿음이 제이피리스 시민들을 한 몸으로 단결되게 하였고, 그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도 일말의 두려움 없이 다가올 전쟁을 예비했다.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의 민중을 향한 사랑은, 그가 영주의 위치에 올랐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진실됨이야말로 제이피리스 시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놀라운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한편 이 시대를 돌아보면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과 같은 지도자는 사라지고, 다시금 냉혹한 현실논리 가운데 이기심을 펼치는 이들이 판치고 있음에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한편 당시 평민출신의 무명 재야인사에 불과한 돈울프 공도 이렇게 자유롭게 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이피리스 혁명정부는 민중을 중심으로 기존의 계층 질서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데프치오 출신이던 돈울프 공이 다른 유력 군주가 아니라, 제이프리스의 칼라인 듀리온 전하를 찾아온 것은 이러한 연유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미루어 짐작해본다.

한편 무수한 시민들이 민병대로 자원했음에도, 실제 제이피리스 전투에서 영웅왕 칼라인 듀리온은 소수의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진군해오는 적들에게로 나아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진군을 저지하며 싸운 배경에 대해, 영웅왕의 오랜 동료이자 후일 장군이 되었던 브레넌 경은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제이피리스 시민 중 절반 이상이 민병대로 자원했다. 아직 주근깨가 가시지 않은 소년부터 오십 줄에 이른 사내까지 모두가 창검을 들고 전쟁터로 나갈 기세였고, 여자들도 온갖 전쟁물자를 보급하고 공성전 방어에 참여하겠노라고 줄을 이었다. 공성전에서 방어측이 대략 1 대 4 정도의 우위를 보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에 맞출만한 병력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칼라인의 눈빛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을 담고 있는 듯 했다. 오랫동안 칼라인과 함께 말을 달리며 검을 휘둘러온 우리들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병력의 열세로 인한 걱정 따위가 아님을 알았다.

“저 멀리 제국의 북방 변경에서부터 오랫동안 나와 함께 싸워왔던 제군들. 늘 나를 믿고 따라와줘서 고맙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네. 제군들은 나와 피를 나눈, 누구보다 소중한 동료들이네.”

연병장을 찾은 칼라인. 나는 이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 밖에 나오지 않는군.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생명과도 같은 동지기에, 제군들 말고는 희생을 부탁할 수가 없어. 저 민병대는…. 사기가 충천하다고 하지만, 평생 칼붙이를 제대로 쥐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 난… 차마 저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군.”

“미쳤다고 해도 좋네. 날 욕하고 떠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당장 그렇게 하게. 난 그래야 마땅할 사람이니까. 저 미약한 민병대가 사실 우리의 희망인 상황에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모두를 죽음에 몰아넣을 어리석은 짓이라고들 하겠지.”

“하지만 전쟁은 전사의 몫이라고 믿네. 전쟁은 자기 목숨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짊어진 군병들의 것이어야 해.”

아무도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모두가 칼라인의 다음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우리도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제군들에게 명한다. 우리는 유격대로서 출진해, 진군해오는 포르투스 백작의 군대의 발을 묶고 저지하는 작전에 돌입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과 가까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믿는 사람들 말고는 희생을 부탁할 수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와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데, 그는 도리어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이 아끼는 이들에게 희생을 부탁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이미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영웅이다.

영웅이 영웅인 것은, 그가 범인(凡人)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저 위대한 기사 세렌2)과 붉은 꽃의 대마법사 마그누스의 비장하고 장렬한 최후3)가 밝혀진 바 있다. 그들이 죽음의 잔까지도 그토록 기꺼이 마실 수 있던 것은, 영웅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가장 아끼는 이들에게만 희생을 부탁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너무나도 고결한 심성을.

댓글

백광열, %2007/%10/%24 %22:%Oct:

돈울프의 냉정하고 계산적인 면을 표현해보고자 끌어넣어 보았습니다. (다소 무리라 생각되시면 말씀을. ;;;)

 
정석한, %2007/%10/%24 %23:%Oct:

제이피리스가 아킬라니 지방의 부분이라는 제 개인적 견해와 부합되는 글이 나왔네요. +_+

문제는 세인님(피디아스 바르삭) 께서 작성중이신 기사와 모순이 생길 듯 한데, 글을 마무리하지 못하셨으니 반박처리가 되기도 어렵겠네요. ^^; 뒷일은 뒤에 걱정해야 하려나요?

주인공인데도 소외되어온 (..) 칼라인의 성품이나 일화가 드러나게 되서 즐겁습니다.

 
_엔, %2007/%10/%25 %03:%Oct:

광열 님은 정말 주인공인데도 주인공으로 다뤄지지 않아온 칼라인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군요! 돈울프의 계략도 재미있었고 여러 인물들이 재등장해서 설정집 채워넣으면서 재미를 느꼈답니다!

 
백광열, %2007/%10/%26 %08:%Oct:

웨스트랜드 공작을 포르투스 백작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유는 사소한데… 지금 쓰려는 제이피리스 전쟁의 무대를 겨울로 하고 싶거든요(-_-); (석한 님의 [인간의 투쟁]에선 6월 8일에 연합군을 격파한 것으로 나오니…) 그 부분을 반박해야 할 듯 싶네요. 흑;

 
정석한, %2007/%10/%26 %10:%Oct:

글의 큰 흐름이나 줄거리에 전혀 상관이 없는 부분인데 굳이 반박하실 것 까지야. ^^; 제가 글자 하나 수정하면 끝나는 일인걸요. 인간의 투쟁 기사에서, 제이피리스 전쟁의 날짜를 1월 8일로 수정하였습니다. 눈과 전쟁. 멋진 기사를 고대하겠습니다. +_+

 
오승한, %2007/%10/%26 %09:%Oct:

드디어 칼라인이 영웅답게 나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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