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사양구팽 (狡兎死良狗烹)

불패의 명장 세렌은 건국의 제일 공신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돈울프 공을 중심으로 한 아데프치오 세력이나, 자비에르 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우노스 정교회의 역할은 건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하나의 시대적 흐름이며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돈울프 공, 자비에르 대주교라는 개인과 그 집단을 떼어 놓고 본다면, 개인으로서의 두 분의 공훈은 세렌 경에 미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점을 인정받아 세렌 경은 건국일등공신 중에서도 가장 처음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며, 갖은 명예로 보상받았었습니다.

그런 세렌 경은 듀리온 왕국이 반도를 통일하고, 유일무이한 반도의 지배자로 자리잡은지 고작 한 달이 안되는 기간 안에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고, 마흔 두가지 죄목을 탄핵당해, 군권을 박탈당하고, 급기야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돈울프 공과 진 뤠이신을 중심으로 한 아데프치오 세력의 조직적인 정치적 공세 끝에 구 제국파는 하나둘씩 무너져 내렸는데, 특히나 이 ”세렌 탄핵” 은 ”마그누스 살해1)“과 함께 구 제국파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필자는 당시 진 뤠이신세렌 경 사이에 오간 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불초 뤠이신. 삼가 건국일등공신. 무후. 전군대도독 세렌 장군께 아룁니다. 장군께서 평생 각지를 종횡하여 평생토록 패배를 몰랐고,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전하의 천하에 조력하였음을 이미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이제 반도 구석구석까지 전하의 성덕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이 없으니, 이 또한 장군의 큰 공이올습니다. 그리하여 장군은 군의 최고 지위에 올라, 그 위로는 오직 전하 한 분이 계실 뿐이니 그 영예와 권세가 드높다 하겠습니다.

이에 장군을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무리가 나타남은 자연한 이치이옵니다. 불초의 고향에는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고 하였으니, 유능한 명장은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경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옵니다. 이제 전하에 맞설 자가 없음이니 안심하고 검을 놓으셔도 될 일이옵니다. 그럼에도 장군께서 줄곧 군권을 한 손에 쥐고 놓지 아니하시니 불초는 심히 저어되옵니다. 그 군사를 휘몰아, 이제 누구를 치실 것이옵니까. 장군이 일평생 전하께 충성해온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옵니다. 장군의 평생, 공은 있어도 죄는 없다는 것 역시 잘 아옵니다. 하오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비록 마음은 다른 뜻이 없으나, 그 행실은 조심하지 못했으니, 자칫 평생 쌓아온 큰 명예를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장군이 만에 하나라도 불온한 마음을 품는다면, 이미 천하의 군권이 장군에게 있고, 또한 장군은 에레모스 전체에서 제일가는 명장이니 누가 있어 장군을 막으오리까. 이에 우리가 오늘날 장군을 “삶으려” 하는 것은 나라의 안녕평안과 전하의 태평성대를 위한 것이지 결코 다른 뜻이 없는 일이옵니다. 불초 부족한 몸이나 오래 전하를 뫼시고, 장군과 함께 전하의 천하를 위해 함께 노력한 몸입니다. 고난을 함께 하고 이제 영화를 함께 누릴 참인데, 어찌 기꺼이 장군을 내치겠나이까. 휘루(揮淚), 단장(斷腸)의 마음으로 행하는 일이옵니다.

이미 탄핵문이 준비되어 있사옵고, 다음 회의에서 모든 대신들이 일제히 장군을 탄핵할 것이니 죄를 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불초 또한 그 날이 오면, 그간 장군과 담소하던 혀로 장군의 죄를 만들 것입니다. 불초는 마음이 갑갑함을 이길 수가 없나이다. 이 세치 혀로 오로지 국가에 헌신한 이를 꾸짖게 될 그날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보름달이 뜨기 전에 낙향하십시오. 불초 불민하나마 타이샨에 저택을 마련하였습니다. 자손 대대로 편안히 쓸 재화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타이샨이 불편하다 하시면 다른 곳으로 모실 것이옵니다. 장군께서 마음대로 가실 수 있도록 큰 배에 물자와 재보를 가득 담았습니다. 부디 다음 왕실 회의 전에, 에레모스 반도 밖으로 나가십시오. 부디 불민한 불초의 혀로, 영광스런 장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게 해 주십시오. 삼가, 돈수재배하여 아룁니다.

진 뤠이신의 편지는 당시의 정황을 짐작하게 해 주는 사료입니다. 필자는 “이미 군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세렌에게 이러한 형태로 선전 포고를 한 것은 뤠이신의 실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이어 발견된 세렌의 답신을 보고 오히려 절묘한 한수였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뤠이신이 진정으로 그녀의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었겠으나, 결과적으로 세렌이 군권을 휘둘러 폭주하는 결과는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었으니까요.

뤠이신. 현명한 분이여. 보내주신 서신은 고맙게 받았습니다. 처음 그대가 저 지평선 너머까지 늘어놓은 행렬에 가득 황금을 싣고 나타난 이래, 그대는 줄곧 나를 놀라게 하는군요. 누구도 그 눈으로 믿기 어려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처럼, 이제는 내가 감히 상상해 본 적 없는 방법으로 내게 작별을 고하려 하는군요.

현명한 분이여. 나는 비록 그대만큼 사리에 밝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세상이 돌아가는 방법은 짐작하는 사람입니다. 전하의 새 시대는 따스한 봄날, 담 아래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같이 따사롭고, 함께 피는 꽃들처럼 향기로워야 하겠지요. 그 아름다워야 할 나날을 이 피 묻은 손으로 더럽혀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재무 대신이나 집사부 대신과 같은 분들이 필요하겠지요. 현명한 분이여, 새 시대의 만찬에 내가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어찌 내가 모르겠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배에는 타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 에레모스의 어디에도 이 몸을 맡길 곳이 없듯, 바다 건너 저 먼 타이샨이나, 이름모를 이국의 어느 땅에도 내가 안식을 취할 땅은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북편 하늘이 어둡고, 검은 구름이 몰려오지만 나는 이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아니하겠습니다. 뇌성이 이 몸을 때리고, 비가 적시어도 그 또한 전하의 벼락이요, 폭우이니 오롯이 서서 겸허히 받을 뿐입니다.

타이산의 옛 말에는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하시었지만, 나는 타이샨에 다른 말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무인은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하였다지요. 처음 고귀하신 전하를 뵙고, 그 앞에 무릎꿇고 그 손에 입맞추어 전하를 경배하던 그 날, 내 목숨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것이 아닌 목숨, 그 주인이 거두겠다 하면 기꺼이 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였듯이, 불길 속을 걸어가게 되겠지요. 이미 많은 이들이 내게 알려 주었기에 나는 나의 운명을 이미 짐작합니다.

나는 그저 눈을 감고 소망해 볼 뿐입니다. 우리가 함께 보낸 그 수많은 날들이 결코 헛되지 아니한 것처럼 다가올 나의 죽음 역시 헛되지 아니하기를. 나의 몸과 피가 전하의 꽃밭에 양분이 되기를. 그렇게 나의 영혼이 왕국 곳곳을 돌며, 바람이 되어 전하의 땅을 쓰다듬게 되기를. 풀잎을 어루만지고 잎새에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전하를 찬양하는 노래가 되기를. 어느 봄날 평온한 전하의 세상을 보며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뿌릴 수 있기를. 그 봄비에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고, 다시 열매를 맺고 다음 봄날을 기다리듯, 그렇게 영겁의 세월동안 전하를 축복하는 꽃으로 피기를.

솥에 삶아지는 그 순간까지, 전하의 충직한 사냥개로, 전하의 먼 발치에 앉을 수 있기를.

이 눈이 빛을 잃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전하를 바라보고 있을 수 있기를.

세속의 말로 드리는 축복이 그분께 누가 되리라는 것 모르지 않으니2).

화형장의 불길이 이 몸을 감싸, 전하의 영광을 밝히는 불길로 사르길.

이 두 통의 서신에서, 아데프치오 세력이 구 제국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거목이었던 세렌이 어떻게 사라져갔는지를 밝힐 수 있게 되어 필자는 무척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세렌은 다가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내 물러나지 않고, 의연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충심이었는지, 아니면 연심3)이었는지의 여부는 저 서신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적어도 건국왕 전하에 대한 세렌의 마음은 그 어떠한 다른 공신들의 충성심보다 깊고 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에 언급한 뤠이신의 서신에서 드러나듯, 세렌의 공훈은 여러 공신들 사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생토록 패배를 몰랐고”나, “위로는 오로지 전하 한 분이 계실 뿐” 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렌은 새 시대를 경영하기 위한 경륜이 부족한 일개 무인이었고, 또한 아데프치오 - 우노스 정교회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는 인물이기 때문에, 정작 통일 이후에는 제거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이후 구 제국파 인사들이 무참하게 숙청되는 결과를 불렀지만, 정작 그 핵심 인물중 하나인 세렌에 대해서는 아데프치오 세력조차 관용을 베풀어, 그 목숨은 살려 주려고 한 흔적이 엿보이는게 놀랍습니다. 이후 세렌은 “비록 마흔 두가지의 죄목이 있으나, 생전에 지은 공으로 충분히 덮고도 남음이라.” 라 하여, 그 지위와 시호가 사후 복권되기에 이릅니다.

뤠이신의 서신이나 사후 복권 조치의 두 가지를 두고 볼 때, 세렌이 살아 생전 놀라운 공을 세웠고 그 사실은 정적이었던 아데프치오들 역시 인정할 정도였다는 추론은 쉽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의 흐름은 더욱 필연적이고 냉혹한 것입니다. 제 아무리 유능하고 공이 많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대세를 거스르는 인물은 안타까운 패망을 맞이하는 법이니까요. 자신의 최후를 이미 알면서도 흔들림 없이 의연했던 명장, 세렌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래서 더욱 숙연해집니다.

1) 붉은 꽃의 견해를 따름
2) 세렌은 이 시기에도 줄곧 엘레할 신앙을 신봉하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3) 다른 공신들과 다르게, 세렌의 마음은 왕국이나 시대의 뜻 등과 무관하게 건국왕 전하 개인만을 시종일관 향하고 있었으며, 저 서신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전하에 대한 찬양 가운데 채 감추지 못한 한 줄기 연심을 느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필자의 독선이라고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댓글

정석한, %2007/%10/%22 %01:%Oct:

세렌의 편지 부분은 요정의 작별인사 를 참조했습니다. ^^; 내용의 참조가 아니라, 표현법이 그렇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좋은 기사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로키, %2007/%10/%22 %09:%Oct:

우..우에엥..;ㅁ; 너무 가슴아프잖아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스러져 가면서 동시에 더욱 애잔하게 돋보이는 사람의 마음..이랄까 하는 게 느껴지네요. 개인적 로망이기도 한데 너무 잘 표현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뻐요..흑흑. 한편 '존중하고 아끼는 적수'라는 복합적인 감정선도 멋지고, 가슴 미어지는 글을 쓰고 나서도 입장을 완전히 분리해서 냉철하게 분석하시는 솜씨에도 반했습니다. ^^

 
_엔, %2007/%10/%22 %16:%Oct:

우선 뤠이신 부분 즐겁게 읽었습니다. 여태까지 능력 있는 상인으로서의 모습만 보여주었던 뤠이신의 냉정한 듯 정 있는 성격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석한 님의 삼국지체!가 빛을 발했네요.

세렌의 편지는 읽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제 글을 많이 좋아해주시고 주의깊게 읽어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기뻤답니다.

세렌은 결국 요정 친구가 부탁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져갔군요 ;ㅁ; 단순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라 강직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의 세렌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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