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대지

안힐라스 최북단의 불모지. 다크엘프의 거주지이다. 다음은 드워프 여행가 로카르 라피슨의 책 '안힐라스 여행기'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땅의 모습

지질학자 크세노스(Xenos)의 연구에 따르면 허무의 대지는 1000여년 전 지각에 강한 충격을 겪고 지하수가 급격히 유출하면서 지반이 붕괴해 형성된 분지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역사와 대조하여 보면 이 일대가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1500년 전 세계수가 불타 쓰러지고 대륙이 셋으로 갈라진 시기일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실제로 각 대륙 해안의 분열기 지층을 조사하면 허무의 대지 형성기 지층과 비슷한 시기라는 것은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 존경스러운 학자들의 뛰어난 연구와 조심스럽고 언제나 잠정적인 과학적 결론을 잠시 제쳐두고 이 험한 불모의 땅을 그저 육안으로 바라보는 이는 증거와 방법론을 넘어 이 땅의 '진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수의 붕괴로 허무의 대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추측이나, 이 땅을 직접 와서 본 이의 마음 속에서 그것은 이미 확신이다. 이 땅은 그 오래 전의 참혹했던 전쟁과 대분열, 한 시대의 상실이라는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것이다.

형성기의 험난한 역사를 증명하듯 이곳의 지리는 불친절하고 종종 치명적이다. 허무의 대지를 구성하는 거대한 분지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은 고운 잿빛 흙이 날리는 땅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불규칙하고 험난한 구릉과 깊고 가파른 계곡들은 지반이 내려앉은 시기의 말 없는 증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량한 모습에는 동시에 묘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이 땅에 생존하고 심지어 번성하는 민족만큼이나 허무의 대지는 잔혹하고 위험한 곳이지만, 동시에 이곳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대지에서도 느낄 수 있는 엄격한 강인함에는 경외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의 날씨는 온난하며, 남쪽의 아나르 시릴이나 만다란 정글보다 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난 엘모스아렌 고원이 서쪽에 방벽을 만드는 남부 지역과는 달리 구릉과 평원이 주를 이루는 허무의 대지에는 비구름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비가 오더라도 잿빛이 주조를 이루는 척박한 대지는 검푸른 진흙탕이 될 뿐 조금도 풍요로워지지 않으며, 비가 그치면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잿빛 흙은 다시 먼지처럼 날린다. 허무의 대지라는 명칭은 이 모습을 지켜본 후에, 혹은 이 척박한 땅에 무모하게 농업을 시도한 연후 탄식처럼 나온 이름이리라.

다크엘프의 언어로 허무의 대지는 아샤'에나타에르 (Asha'enataër), 재와 탄식과 눈물의 땅이다. 실제로 이곳의 토양은 그 색상과 성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재'이다. 그것도 울창한 만다란 밀림이나 아나르 시릴의 온화한 숲속 낙원의 토양이 된 화산암 토양와는 다른, 어떤 생명도 품지 않고 허용하지도 않은 채 공허하게 날리는 재이다. 예외가 있다면 질긴 덤불이나 바람에 뒤틀린 조그만 나무, 기묘하고 종종 사나운 돌연변이 동물들, 그리고 다크엘프들일 것이다.

세계수의 잔해

허무의 대지를 뒤덮은 고운 재는 허무의 땅 북쪽에 흉하게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잔해, 불탄 세계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생명을 잃은 지금도 이전의 위엄을 떠올릴 수 있는 규모인 세계수의 잔해는 왠만한 도시와 그 주변지역보다도 넓은 지역을 차지한 목탄과 재와 뼈의 폐허를 이룬다. 마치 고통에 차 내민 수많은 손처럼 하늘을 향해 들쑥날쑥 내뻗은 채 새카맣게 타버린 거대한 밑둥이 그 중심에 있고, 주변에는 왠만한 거목만한 나뭇가지와 움막의 지붕을 덮을 만한 나무껍질 조각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 벌어진 1차 대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 중 죽은 많은 전사자와 그들의 탈것의 뼈는 세월에 색이 바래 잔해의 새까만 재와 대조를 이룬다.

죽은 세계수의 잔해는 아마도 안힐라스에서 가장 처량하고도 숙연한 성지일 것이다. 불탄 세계수가 남긴 고아인 다크엘프는 이곳을 밤낮없이 지키며, 그들의 대사제에 해당하는 아샤'쟈나인 (Asha'janaïn, '재의 여인' 혹은 '재의 여왕'—이들의 언어에는 '여인'과 '여왕'의 구분이 없다)은 아직까지도 오르는 재와 연기 때문에 숨쉬기조차 쉽지 않아 보이는 잔해의 가운데에 거하며 민족에게 신탁을 내린다. 그녀는 군사지도자인 라카'쟈나인 (Raka'janaïn, '붉은 [피의] 여인') 이상의 위상이 있으며, 그녀가 내리는 세계수의 신탁은—모든 신탁이 그렇듯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다크엘프에게는 절대적인 명령이다. 흔히 말하는 다크엘프 여왕은 외부와 접촉이 잦은 군사지도자인 붉은 여인이지만, 장로들과 각급 부족장들의 뜻을 혼자 거스르기는 어려운 붉은 여인과는 달리 재의 여인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되 그 권위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다스리되 군림하지 않는' 붉은 여인과 '군림하되 다스리지 않는' 재의 여인은 다크엘프 통치구조의 대조적이고도 상호보완적인 두 축을 이루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다른 장으로 미루기로 하자.

주요 지역

메타포노비아 (Metaphonobia)

다크엘프의 수도이며, 라카'쟈나인의 거처인 하타라야 ('내쫓긴 이들의 거처')가 있다. (비록 그녀가 언제나 그곳에 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카'쟈나인은 식수와 사냥감을 찾아 유랑하는 다른 부족장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무는 편이다.) 해가 서쪽에서 비출 때면 세계수의 그림자에 완전히 잠기는 이곳은 세계수를 지키는 관문이며, 다크엘프 부족들이 회합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바위투성이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목책을 두른 정착촌으로, 목책 내를 비롯해 주변의 언덕과 평원에는 허무의 대지에 흔치 않은 규모인 500여 가구의 정착촌이 형성되어 있고 주민 일부는 약간의 농사마저 짓고 있다. 이는 세계수의 가호라고 하는, 허무의 대지에 얼마 없는 영구적 우물이 있는 곳이기에 가능하다. 부족 회합의 시기에는 훨씬 인구가 늘어나며, 부족 전사들과 그들의 전사들이 마차와 천막을 빙 둘러치면서 임시 도시를 이룬다.

성채 가운데에 위치한 하타라야는 메타포노비아가 아니면 허무의 대지에는 보기 드문 목재로 지은 건물군으로, 가장 큰 본채를 주변으로 열 채의 집이 양옆으로 나뉘어 서있다. 그 주변에는 다시 넓은 마당이 있다. 다크엘프 친우의 귀띔에 따르면 각 집은 부족장과 그들의 식솔들이 들어와 거주할 수 있으며, 본채에는 정면에 거대한 회합 홀과 그 뒤에는 라카'쟈나인의 집무실, 양옆으로는 라카'쟈나인과 그 식솔들의 거처가 있다고 한다. 열 채의 집은 세계수가 불탄 열흘 낮과 열흘 밤을 상징한다.

죽음의 호수 (Deadlake)

세계수의 잔해에서 며칠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볼 수 있는 죽음의 호수는 실은 호수가 아닌 거대한 유사(流沙)지대로서, 주변의 땅과 육안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없지만 밟으면 바로 빠져들어가는 위험천만한 곳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반이 가라앉고 그 자리를 세계수의 고운 재가 채운 후 안힐라스에 부는 편동풍이 그 표면을 평탄하게 골라서 일어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죽음의 호수에는 가끔 이곳에 가라앉은 불운한 희생자들의 뼈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는 하는 괴기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일곱 자매 (Seven Sisters)

붉은 화살 협곡 (Red Arrow Ravine)

아나르 시릴과 경계를 이루는 남쪽 능선을 통과할 수 있는 두 개의 주요한 관문 중 하나인 이 협곡의 이름을 보아도 이미 다크엘프와 엘프 두 형제 종족의 불행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 아나르 시릴을 약탈하려고 했던 다크엘프 전사들은 추격해오는 엘프 군대의 화살을 피해 이 협곡으로 쫓겨왔으며, 이때 그들의 피가 주변의 땅을 물들였다고 한다.

가우르 길 (Gaure Way)

아나르 시릴로 가는 동쪽 관문으로, 이 길은 능선이 끊어진 곳이 아닌, 능선을 넘어갈 수 있는 좁은 길로써 가우르 기수들이 엘프 국경수비대인 펠러 티리스의 눈을 피해 암습이나 잠입을 시도하곤 했던 길이다. 그리고 종종 기수 없이 가우르가 혼자 넘어가 아나르 시릴을 통과해 만다란까지 내려가는 여행길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다란 밀림의 우기가 다가올 때면 발정한 암놈을 쫓아 숫놈이 가우르 길로 넘어가고는 한다. 다크엘프들이 열렬한 구애를 가리켜 '남쪽에서 바람이 불었나..' 하고 웃는 것은 이 현상을 빗댄 것이다.

자바드 나알라 (Zabad Naala)

한디르 드워프들이 사용하는 고대 드워프어를 그대로 딴 이름으로, '군주의 길'이라는 뜻이다. 한디르 드워프의 수도 드랏도르에서 북으로 뻗은 대로인 군주의 길은 허무의 대지와의 경계인 나즈막하고 완만한 능선을 거침없이 넘어가며, 이 길은 드워프들과 바이두르야 부족이 협력해 운영하는 교역초소와 그 주변에 생겨난 정착촌인 샬란에서 멈춘다. 샬란은 다크엘프와 드워프뿐 아니라 혼혈인과 심지어 인간 (주로 노스탤지어 요원이거나 협력자)도 드나드는 활기찬 곳이다.

바위문 (The Boulder Gate)

동쪽 능선에서 말로른 숲으로 가는 관문으로, 이곳에서는 능선이 끊어져 있어 많은 수의 말과 다크엘프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지만 평소에는 발자국이나 인기척이 일체 없다. 이 문 바로 너머에는 기묘한 문양이 뒤덮은 (혹은 그저 풍화의 자국일까?)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듯 놓여있어서 이 문을 지나는 일행이 있다면—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양옆으로 갈라져 지나가야 한다. 전설에 따르면 다크엘프 전사들이 숲에 식량을 구하러 들어간 다음날 아침, 이 바위는 전사들의 시체들과 함께 나타났다고 한다. 바위는 마치 숲을 지키는 이름없는 정령들의 말없는 경고처럼 굳건히 안힐라스에서 가장 깊은 숲으로 통하는 관문을 지키고 있다.

철의 골짜기 (Iron Valley)

서쪽 타우르 화산지대로 가는 주요 관문. 능선을 올라가 골짜기 입구로 들어간 후 이틀 정도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타우르 평원으로 진입한다. 이 길로 드워프들이 철을 보내준 역사 때문에 철의 골짜기라고 부른다. 골짜기의 타우르 쪽 입구에는 작은 교역 마을 에스틴이 있고, 허무의 대지 입구에는 다우르가하 부족이 운영하는 작은 교역과 숙박용 마을이 있다. 부족이 마을로 돌아오는 철에는 인구가 몇 배 늘지만, 상주 인구는 30 가구 정도이다. 골짜기를 따라가다 보면 쉬어갈 수 있는 객전과 그 주변의 소규모 정착촌이 두 군데 있다.

거인의 망루 (The Giant's Watchtower)

난 엘모스와의 경계에 있는 남쪽 능선의 관문으로, 이곳에서 능선은 허리가 끊어진 채 한쪽이 다른 쪽에 걸치듯 하여 하늘을 찌르듯 비스듬히 솟아있다. 이 '망루'의 그림자 속에서 능선을 넘어가는 길은 비록 험하고 가파르지만 충분히 넓어서, 이곳을 통해 난 엘모스의 아이언피스트 드워프들은 초기 다크엘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한 식량과 물자가 가득한 수레를 몰고 허무의 대지로 들어갔다. 드워프들은 다크엘프들의 양해를 구해 '망루' 꼭대기에 초소를 설치해 이름 그대로 남쪽을 경계하고 천체를 관측하기도 하는 망루로 사용한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다크엘프의 특성상 정작 다크엘프가 망루에까지 올라가는 일은 거의 없다. 망루 안쪽에는 오랜 옛날 드워프들이 자연동굴을 확장한 터널들이 있다고 하나,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손상되었을 것이며 본래 수평이었던 바닥은 모두 가파르게 위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