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약 ===== 어둠이 짙게 깔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엘리아스는 눈가를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으며, 자신 앞에 있는 여성을 보고 있다. 여자는 바위에 몸을 결박당한채,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엘리아스를 쳐다본다. 온 몸으로 비를 맞는 추위 따위는 잊은채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려 애쓰지만 그녀의 몸을 옥죄이는 밧줄은 견고하기만 할 뿐이었다. 엘리아스는 그녀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는 잘 모른다-. 단지 그녀가 오늘 밤 유쾌하지 못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만 알 뿐. "살려주세요..." 얼마나 외쳤을까, 이미 목이 쉰 여자의 목소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엘리아스의 마음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속삭인다. '양심' 이라는 놈이리라. "빌어먹을! 빌어먹을! 네 말을 따라서 이 꼴이 되었다고!" 그 날, 차라리 아르미체를 죽였다면, 그 옆에 서 있는 요제프를 죽였다면...! 아니다. 다른 한 편에서 냉정하게 엘리아스의 이성이 그 때의 일을 분석한다. 자신의 힘으로는 요제프라는 놈은 커녕, 아르미체의 입을 막을 힘조차 없었다. 지금 이렇게 달아난 것만으로도 행운인 것이다. ...달아나? 엘리아스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도망친 게 아니지. 아마릴리스를 팔아먹고 이렇게 된 거지!" 아르미체의 행동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이런 고통은 느끼지 않았을텐데. "아마릴리스가... 그 놈의 아이를 뱄다고?" 요제프의 집 주위를 돌면서 감시를 하다가 들은 소식. 그 소식은 엘리아스의 마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충분했다. 아마릴리스가... 아마릴리스가... "아니야. 그 놈이 강제로 아마릴리스를..." 엘리아스의 눈앞에 환상과 같이 요제프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주받을 아이전인은 울부짖는 아마릴리스의 옷을 찢고, 침대로 내팽개쳐서...! 엘리아스는 노호성을 지르며 - 마침내 마지막 망설임마저 떨쳐버린 채 - 힘을 갈구하는 마음을 모아 레기온의 불꽃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떠한 비술도, 주문도 몰랐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 레기온의 피가 흐르는 자이기에. 태어나기 전부터 영혼의 근원에 뿌리깊게 새겨져 있던 권능의 언어가 엘리아스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 \\ **심연의 바다에서 자란 그대는\\ 자비와 동정을 모르는 울부짖는 불꽃이로다.\\ 기도와 탄원따위는 상관않는 뱀이며, 맹렬한 야수로다.\\ \\ 파괴된 땅에 어둠을 몰고오는 폭풍.\\ 위대한 옛것.\\ 포악한 괴물.\\ 무자비한 살인마.\\ 흘러내리는 비늘에 덮인 용.\\ \\ 거대한 힘이여.\\ 거대한 몸이여.\\ 심연에서 깨어날지어다.\\ 그 사슬을 풀고 내 몸에 강림할 지어다.\\ \\ 곡식처럼 이 몸을 갈아버려도 상관하지 않는다.\\ 내게 원수를 무찌를 수 있는 힘을 준다면!\\ ** \\ \\ 폭풍우가 거세진다. 여자가 몸부림친다. 그녀의 몸을 축축히 적신 빗물이 하얀 김을 내면서, 마르고, 증발한다. 그녀의 눈과 입에서 불꽃이 새어나오기 시작하고, 여자의 비명은 그녀의 몸을 휘감는 화염에 뒤덮여 버린다. 엘리아스는 황홀한 듯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인간횃불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폭풍우를 압도하고 환하게 치솟아오르는, 신성함과 불경함이 뒤섞인 검푸른 레기온의 화염이 그를 환영하듯 날름거렸다. 엘리아스는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듯 불의 기둥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다. 불꽃은 그의 눈과 코, 입, 귀, 그리고 모든 피부를 통해 그의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불꽃이 주는 황홀감에 몸을 부르르 떨던 엘리아스는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어두운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것이 순혈(Full-Blood)의 힘이군." 엘리아스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폭풍 속에서도 두 손은 젖지 않은 채 열기를 띄고 있었다.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불꽃의 피.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엘리아스는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며,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