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을 바꾼 사랑 ====== 일리야와 아르테미시온 두 쌍둥이 자매의 왕위 계승권 싸움은 제국을 초토화시키고 테르시야누스가 즉위하기 전까지 상당 기간 동안 권력의 공백 상태로 몰아넣어 결과적으로는 [[calain_durion]]에게 에레모스 반도의 지배권을 내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유래 없는 내전은 강력한 요정 레드리스가 차기 황제 선택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선택되지 않은 자매 아르테미시온을 도와 반란을 일으킨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르테미시온이 그녀 자신과 일리야 모두가 죽게 되는 일전을 앞두고 레드리스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 반란의 동인이 두 사람간의 사랑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옛 것들을 파괴하고 또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만큼 새로운 것들을 불러온 거대한 혼란이 소녀와 젊은 요정의 소꿉장난 같은 사랑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을 믿기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랑이 어리석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벌을 받아 마땅한 악인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만약 이 사랑이 실재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사랑에 대한 그들의 진실성과 그 사랑이 지니고 있는 일말의 위대함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사랑은 진실하고 위대한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훗날 레드리스는 루오르 아마란타와 함께 아르테미시온의 이복동생 시얀((아르테미시온과는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었다. 테르시야누스가 정식 이름이다.))을 차기 황제로 추대하고 결국은 그를 위해 죽습니다.(([[1000]] 참조.)) 요정들은 사랑한 사람이 죽으면 결코 그만둘 줄을 모르고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 있는 자를 찾아 사랑을 대물림해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이 사랑한 이를 위해서도 아니고 겨우 그녀의 핏줄을 위해서 죽은 레드리스의 사랑도 어떤 의미에서는 집착이라고 부를 수 있고 어리석음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서고 죽음을 감수하는 사랑이 진실하고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누가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엘다렌((제국의 왕족들이 스스로의 나라를 부르던 이름.))에 눈보라를 몰고올 재앙의 쌍둥이였는지도 몰라. 한 번도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나의 자매, 일리야. 사람들이 그녀를 단단하고도 생명력 넘치는 왕의 재목이라고 부르는 것만, 나는 귀가 닳도록 들어왔어. 저 깊은 왕궁에서 어떤 인간에게도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우리 아버지를 닮았다고.((요정들의 사랑은 대물림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받아 황제가 된 아버지를 닮은 쪽이 다음 대에도 사랑받고 황제가 될 확률이 크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걸까? 역시 왕의 운명은 날 때부터 핏속을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나는 왕궁의 사람들이 그녀를 페르세포네((신화 속의 여신. 저승의 왕과 결혼하여 한 해의 반은 저승에서 지내고 나머지 반은 이승에서 지내는데, 그녀가 이승으로 돌아오면 대지가 기뻐하여 봄이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 아르베스에서 겨울을 보내고 밝은 계절이 왔을 때 사람들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쪽은 그녀였으니까.((왕위 계승권자들은 요정들의 성지 아르베스에서 반 년, 왕궁에서 반 년을 지내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계승권자가 둘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번갈아서 아르베스와 왕궁에 거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긴 그림자를 남기며 궁전이 자리하고 있던 하얀 산맥의 품으로 요정들의 행렬에 둘러싸여 그녀가 돌아왔고 사람들은 봄을 불러오는 처녀의 이름을 연호했지. 그녀를 수행하는 아름다운 요정 장군들, 보석관과 긴 머리의 남자들은 아게하((나비라는 뜻.))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매년 겨울을 동반하고 궁중으로 돌아오는 나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너를, 네가 나의 여행 안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승의 뱃사공, 키론이라고 불렀지. 일리야가 여름이라면 나는 겨울, 그녀의 요정이 아게하라면 나의 유일한 안내자, 너의 또 다른 이름은 키론.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더 이상 그들의 예언을 부당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될 거야. 나는 정말로 겨울을 이 땅에 불러오고 말았으니까. 어쩌면 이건 정말로 처음부터, 그들이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기도 전부터 나의 운명이었는지 몰라. 운명처럼 줄지어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 가지 뿐이야. 키론. 너는 어째서 나를 매 가을 왕궁으로 데려다 주었니? 너의 가문은 강력하고 너는 높은 자리에 있어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너를 저승의 뱃사공이라고 부르게 내버려두었어? 너는 강하고 아름답고 나 같은 사람이랑은 조금도 서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달랐는데도. 그녀가 즉위하고 내가 죽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지 못한 것은 어째서야?((왕위 계승권자들 중 요정들이 선택하지 않은 자들, 즉 다음 황제로 선택되지 못한 자들은 죽였다.)) 혈족과 친구들의 피를 칼에 묻힌 것은 어째서야. 어째서? 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어. 내가 나의 쌍둥이 자매만큼, 본 적 없는 아버지만큼 강렬히 이 삶을 사랑했더라면 통찰력 있는 너의 친족들이 이렇듯 간단하게 나의 죽음을 결정내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들이 옳게 봤어. 네가 틀렸어. 키론. 냉정하고 현명한 레드리스. 이번만큼은 네가 틀렸어. 나는 태생적으로 열정이 결여되어 있어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손을 내밀었을 때, 죽음에서 도망칠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내가 너의 손을 잡았던 것은... 너야. 이유는 오직 너였어. 너의 차가운 말투 너머로 들려오는 장난스러움과 배려가 따뜻했어. 밤이 드넓은 날이면 간간히 방울 소리 들려오는 처마 아래 우주를 숨쉬면서 서 있는 너의 등을 쳐다보는 것이 좋았어. 네가 나를 어린애처럼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 좋았고 나를 실재보다 아름답게 보는 너의 눈이 정말로 -너와 함께 있는 잠시 동안이나마- 나를 더 아름다운 존재로 고양시켜주는 것이, 참 좋았어. 키론. 난 너와 한편이 되서 모험해보고 싶었어. 그것 뿐이야. 이만큼이나 유치하고 거의 장난 같은 생각들이 돌이킬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을 정말 많이 부수고 나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열렬히 삶을 사랑하는, 나의 몇 배로 훌륭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여왔다는 것이 믿어져? 그런데 나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진짜로 죄책감을 느끼고 잃어버린 것들을 안타까워하기 위해선 진짜 어른이 되어야 하나봐. 아아, 믿어져? 나의 어린애 같은 마음과 너의 충동적인 행동에서 시작된 무엇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엄청난 일이 되고 그것 때문에 누군가가 우리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는 아직도 너무 어린데. 이런 커다란 일의 진짜 의미 같은건 깨닫고 있지도 못한데. 가슴을 어루만지면 그 아래 어딘가가 가볍게 욱신대는 것 같아. 겨울 냄새. 추위가 나비처럼 팔랑대며 몸을 감싸고 날아다니는 날이었어.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맞아주는 추위에 온 몸을 내맡겼어. 태양의 방향으로 말을 몰았더니 그 열이 이마를 신의 표지처럼 달구면서 길을 인도했고 난 -녹아내릴듯- 일렁이는 빛과 혼합된 차가움을 혀에 맛보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땅을 말을 타고 산책하면서 나는 작전을 짰어야 했지만 빛에 흠뻑 젖어버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어서 단지 네 생각을 했어.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전, 이길 수 없겠지. 알고 있어. 내 재능으로는, 내 열정으로는 이길 수 없을 거란 거. 너는 나를 도우려고 급히 오는 중이겠지만 레스파 계곡 쯤에서 네 사촌 형제 나이라하가 너를 막을 테고 그러면 나는 너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죽을 거야. 나는 신을 믿은 적이 없어. 언젠가 별로 돌아갈 죽지 않는 영혼도. 그러나 지금 마치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물을 먹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달을 올려다볼 때 나는 영혼이란 것을 장난처럼 반쯤 믿게 되버려. 네가 이 똑같은 하늘을 어느 땅에선가 올려다 볼 때 그곳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먼 곳일지라도, 우리가 이 밤 서로 생각하는 것을 전할 수 없고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므로 영영 알게 될 기회조차 없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대지에서 숨을 쉬고 함께 살아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아? 그것을 놀라워하고 있노라면 어쩐지 두 번 다시 느끼거나 말할 수 없게 된 다음에도 네가 살아있다면 나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는 한 번도 진정으로 살고 싶어한 적이 없었지만 죽음 또한 반길 수 없었던 것이 사실. 그러나 진실을 꿰뚫어볼 수만 있다면 죽음은 조금도 무섭거나 나쁜 것이 아닌지 몰라. 나는 죽음으로써 네 안에 다시 태어나고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게 된 나의 생명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순수한 힘으로 너의 마음 속에 고동치게 될지도. 막사의 문을 젖혓더니 고요함과 차가움과 풀냄새가 몰려들어왔어. 희미한 황금빛으로 산 뒤편이 밝아지고 있다. 하늘 저편으론 초승달이 하나. 이 신비로운 시간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빨리 지나가버리고 한 장의 그림 같은 얇은 추억으로 마음에 남겠지. 날이 밝아오면 말이야. 나의 마지막 날이. 키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만 사랑을 보내. 어떤 삶을 살든 부디 -늘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