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감한 자만이... 성깔 있는 미인을 얻는다? ===== 흑조 없이 혼자 나는\\ 백조 모습 외롭구나.\\ 백조 날개 붉은 피는\\ 그 누구의 피이련가. - 장안을 떠돌던 풍자시 이니스 강변의 마창 대회장 관중석은 환한 햇살 아래 색색의 치장과 터질 듯한 기대감으로 빛났다. 총기가 널리 퍼진 이래 마창 경기는 군사적 명예의 꽃이라기보다는 스포츠 종목에 가까웠지만, 과거에 대한 향수가 오랜 관습에 더해 더없이 인기있는 스포츠이기도 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역시 모든 눈길이 쏠리는 자리는 주최자 가문이 왕가와 함께 앉은 상석이었다. 그리고 그쪽으로 말을 타고 다가오는 한 기수가 있었으니, 마치 아직 다리만 껑충하게 긴 어린 사슴처럼 다소 어색한 품새가 젊은 나이를 그대로 드러냈다. 그래도 햇빛에 하얀 갑옷이 눈부시게 빛났고, 방패에 그려진 하얀 백조는 금세라도 날아갈 듯했다. 기수가 상석 앞에 멈춰서 잠시 말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은 후, 마창을 들어 왕가와 그웨나라르크 부부에게 경례하자 관중은 예의바르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주최측으로서 왕가와 함께 앉은 아스탈키안과 이스갈라드 그웨나라르크 백작 내외는 벅찬 기쁨과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은 조마조마함으로 첫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아들을 내려보았다. 하얀 기수가 투구 덮개를 올리자 콧잔등에 주근깨가 더러 흩어진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역력한 기색으로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리듯 더듬었다. "리..리에하 왕녀님! 이 토너먼트의 가장 아름다운 미인에게 징..증표를 청하니... 제가 당신의 명예를 위해 싸울 기회를 주십시오!" 그가 말하는 동안 그웨나라르크 부부는 불안하게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한 마디 한 마디 귀를 기울였고, 이스갈라드 부인은 심지어 대사를 가르쳐주듯 소리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으므로 효과는 미지수였지만. "오랜만입니다, 그웨나라르크 공자." 답하는 목소리는 청명하고 차분했으며, 더없이 교양이 넘쳤다. 백조의 기수는 칼라인 국왕과 이렌가르드 여왕 사이에 앉은 공주에게 간신히 눈을 들었다. 그리고는 불꽃빛 머리와 은은한 빛을 품은 듯 새하얗고 티없는 피부, 고아하고 약간 냉담하게 무표정한 얼굴을 넋을 잃은 채 쳐다보았다. 최신 유행인 가슴을 받쳐올리는 드레스선으로 강조한 우윳빛 가슴으로 자꾸 눈이 내려가는 정도는 용서할 수 있으리라. 그는 아직 다른 데 눈을 두는 척하면서 몰래 보는 법을 익히지 못한 소년이었으니까. "듣자하니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우리 두 사람을 혼인시키시려는 모양입니다." 리에하 공주의 말에 상석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양 싸아해졌다. 그웨나라르크 부부의 미소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국왕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여왕은 황급히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더니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무릇 정교한 춤처럼 지극히 의례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 귀족의 혼담일진대, 혼인의 '혼'자만 나와도 얼굴을 붉혀야 할 귀한 집---그것도 왕가의!---처녀가 저렇게 거두절미하고 당돌하게 말해 버렸으니 지체 높은 부인으로서 절망에 빠져 울음을 터뜨려도 이상할 일은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손수건 뒤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수상하게도 웃음소리 같았지만 분명 흐느낌을 착각한 것이리라. 폐하의 입술이 실룩이는 것도 곤란함에 의한 안면경련일 것이다. 그웨나라르크 공자는 마치 붕어처럼 입을 반쯤 벌린 채 언어라는 것의 존재를 잊은 모습이 되었다. 유일하게 평정을 전혀 잃지 않은 리에하 공주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웨나라르크 공자는 아직 꽃다운 나이인데, 나처럼 공자보다 나이 많은 여자하고 혼인하기는 싫겠지요?" 드디어 엄격한 예절 교육을 기억했는지 입을 소리나게 꽉 다문 열 여섯의 공자는 스물세 살 왕녀의 불꽃빛 머리칼과 긴 속눈썹이 드리운 하얀 뺨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요?" 기품 넘치는 비웃음을 짓는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얗고 고른 치아가 보였다. 그 순간 어린 공자는 안장에 똑바로 일어나 앉으며 공주를 도전적으로 올려다보았다. "비록 제가 어리다 하나 나이가 아닌 실력으로 평가해 주십시오! 증표를 주신다면 왕녀님의 이름으로 용맹하게 싸워보이겠습니다!" 그웨나라르크 부부가 숨도 못 쉬고 쳐다보고, 국왕도 손가락 사이로 슬쩍 내다보고, 여왕이 눈물기라고는 없는 얼굴을 손수건에서 약간 드는 동안 어린 마나 왕자는 지루하게 턱을 괴었다. 귀족 청년들 사이에 아름다움과 재치로 이름 높고 독설로 악명 높은 공주는 붉은 눈썹 하나를 아주 약간 치켜들었다. 마치 다 죽어가던 싸움닭이 활개를 치며 일어나자 돈을 더 걸까 말까 결정하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이윽고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그 한숨에 공자의 심장이 몇 번이나 제비넘기를 했는지는 시인들이 세도록 내버려두자) 말했다. "공자... 그대 이름이 아덴 그웨나라르크 맞습니까?" "그것이 제 이름입니다." 소년은 이제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다부지게 말했다. "아니면 그대 이름은 '아스파 아덴 그웨나라르크'입니까?" 조용한 물음의 뒤끝에는 긴 고요가 흘렀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조용히 말을 달리며 수천의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용맹, 조용하고 낮던 목소리와 말없던 성격, 앳된 얼굴. 누구에게나 다정하면서도 때로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혼자만의 침묵 속으로 도망치던... 검은 왕자. 끝내 반역의 오명 속으로 사라져간 듀아라르크의 이름. 아들이 태어났을 때 친구의 이름을 땄으나, 그 친구가 죽은 후로는 가운데 이름인 아덴을 쓰게 한 그웨나라르크 공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침묵 속으로 소년의 조심스럽지만 진지한 목소리가 한 마디 한 마디 떨어져갔다. "제.. 제 이름은 아스파 아덴 그웨나라르크입니다." 다시 공주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는 이제 지루한 예절이 아닌 조용한 슬픔을 머금었다. "그웨나라르크 공자는 지극히 긍지 높고 자랑스러운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제 사랑하는 오라버니의, 그리고 아바마마의 자랑스러운 아드님의 이름을." 파란 눈빛에 반짝이는 추억에 홀린 듯 공자는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수많은 사람 앞이었지만 마치 둘만 있는 것처럼 친근한 순간 속에서. "어린 의붓동생들에게 목마를 태워주고 요정과 데오스 이야기를 들려주던 오라버니의 기억을 부끄러워하는 분에게 나는 나의 증표를 맡길 수 없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그 짧은 몇 분 동안 갑자기 한 치쯤 자란 듯 젊은 공자의 태도는 당당했고, 목소리에는 전에 없는 확신이 넘쳤다. "그러니 왕녀님. 제게 증표를 허락하신다면 아스파 그웨나라르크가 감히 왕녀님의 명예를 걸고 이 토너먼트에서 싸우겠습니다." 왕녀는 조금 쓸쓸한 웃음을 지었고, 마치 구름 뒤에서 해가 나온 양 아스파 그웨나라르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리에하 왕녀가 나비 날개처럼 얇고 나풀나풀한 베일을 벗어 그가 내미는 마창 끝에 걸자 그웨나라르크 공자는 조심스레 마창을 바투잡고 공주의 베일을 높이 들어보이니 관중이 환호하였다. 그가 베일에 입맞추고 가슴판 뒤에 밀어넣는 동안 그웨나라르크 백작은 마치 먼 옛날을 떠올리듯 슬프면서 자랑스러운 표정이었고, 이스갈라드 부인은 눈물을 감추어야 했다. "괜찮겠느냐, 얘야?" 공자가 말을 달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국왕은 낮게 물었다. "네가 선택한 챔피언인데..." 왕이 약간 우물거리는 동안 왕녀는 대회장을 내다보며 태연히 대답했다. "예, 아바마마. 그가 무예보다는 학문과 독서에 관심이 많은 청년인 것은 알고 있사옵니다." 포고관이 '아스파 아덴 그웨나라르크'의 이름을 외치자 일순간 좌중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우뢰와 같은 함성에 리에하 공주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챔피언을 시선으로 따랐다. "총기가 널리 퍼진 이 시대에 마창 대회의 무용만으로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웨나라르크 공자의 마창 경례에 리에하 공주는 품위있게 손수건을 흔들어주었다. "아바마마의 딸은 천조각 하나 준 사람의 성적에 자존심을 거는 얄팍한 소녀는 아니옵니다." 국왕은 왕녀의 붉은 머리 위로 여왕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상석에 앉은 사람들은 "이게 다 당신 탓이오!" "키워준 아버지 닮지 누굴 닮겠어요!" 하는 국왕 부부의 숨죽인 말다툼을 못 들은 척해야 했다. ---- \\ 경기가 끝난 대회장은 조용했다. 왕녀 주변에 늘 붐비던 가족과 하인들은 녹아 없어지듯 사라진 상태에서 공주만 혼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고, 튜닉과 망토 차림의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그웨나라르크 공자는 약간 절면서 그런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녀님." 표정 없이 그를 보는 리에하 왕녀 앞에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맞추었다. "왕녀님 이름으로 승리하지 못하고 이 증표를 다시 가져오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는 나풀나풀한 베일을 조심스레 품안에서 꺼내 내밀었다. 대답 없이 잠시 그를 바라보던 왕녀는 그웨나라르크 공자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할 때쯤 입을 열었다. "다리도 다치셨는데 불편하게 무릎 꿇지 말고 앉으십시오." 여전히 베일을 쥔 채 공자는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왕녀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토너먼트의 소음 이후 먹먹할 정도의 침묵이 잠시 흘렀다. "...죄송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손에 든 베일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공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가 다친 머리가 울리자 주춤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천이 아침 하늘의 부드러운 색채로 시야를 가리면서 이마에 와닿자 흠칫하며 몸이 굳었다. "저에게 구시대의 무예보다 소중한 것은 그 최선을 다하는 자세랍니다." 속삭이며 왕녀는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주었다. 오래 전 강변 야유회에서 넘어져 울던 네 살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고 코를 풀게 하던 열한 살 소녀의 다정함으로, 12년이 지난 지금은 어쩌면 그 이상을 약속하는 따스함으로. 그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왕녀를 내려다보는 동안 그녀는 베일을 든 그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그러니 내 증표는 아직 한동안 가지고 있어도 좋아요." "왕녀님..." "적어도 기회는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왕녀는 손수건을 접더니 손을 놓고 그에게서 몸을 조금 떼어 앉았다. 조용한 격정을 품은 목소리는 낮고 위험했다. "아무리 아바마마라도 내가 원치 않는 사람과 혼인시키실 수는 없어요. 언제든 삼촌과 동생이 있는 벨가스트로 도주라도 할 수 있으니 각오해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일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그웨나라르크 공자는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보이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기쁩니다." 공주의 얼굴에도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공자.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무엇입니까?" 공자는 긴장하며 조금 다가앉았다. "아스파 엔듀리온은 제게는 소중한 오라버니였으며, 그의 추억은 제게 아직도 생생하답니다. 말씀은 없으시나 저희 부모님께도..." 늦은 오후 햇빛에 왕녀의 속눈썹은 불꽃색으로 빛났고, 그 사이로 공자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시원하고 푸르렀다. "그래서 더욱, 오라버니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는 어색해요. 그러니 아덴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앞으로도 쭉?" 당시 나무 뒤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고 있던 마나 왕자는 훗날까지도 웃으면서, 그 순간 아덴의 얼굴 표정은 그림으로 그려 두고두고 감상하면 딱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사람좋은 그의 매형은 머쓱하게 웃고, 국왕은 입술을 실룩거렸으며, 여왕은 황급히 손수건에 얼굴을 묻곤 했다. ==== 곁이야기 - 왕녀의 보호자 ==== 이스갈라드 그웨나라르크: (걱정스럽게) 그런데 정말 보호자 없이 둘만 둬도 될까요?\\ 칼라인 듀리온: 제3자가 있으면 새침만 떼고 있을 아이니... (지나가는 마나 왕자의 멱살을 붙잡아 세우며) 아, 그래! 마나! 네가 숨어서 보고 있다가 혹시라도 저 녀석이 누나한테 엉큼한 짓을 하려고 하면 뛰쳐나가서 코에 한 방 먹여! 알았지?\\ 마나: 응! (달려간다)\\ 이스갈라드: 과연 괜찮을지... (손을 쥐어짜며)\\ 얼마 후 마나: 아바마마! 공자는 갔어요.\\ 칼라인: 오, 그래. 누나는 잘 보호했느냐?\\ 마나: 예, 누나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칼라인: 없었는데?\\ 마나: 누나가 공자한테 엉큼한 짓을 하면 어떻게 했어야 돼요? 누나를 한 방 먹여요?\\ 칼라인: ......